말이 통한다는 건 그런 것
왜 그런 날 있지 않나? 아침에 눈을 딱 떴는데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처지고 별로인 날. 그런 날은 꼭 불똥이 주변 사람, 그러니까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튄다. 별것 아닌 일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나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금세 얼어붙는다. 엘사력 제대로 발휘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편이 내게 묻는다.
“왜 그래? “
“그냥... 꿀꿀해.”
복잡 미묘해서 나조차도 알 수 없었던 나의 감정들이 ‘꿀꿀해’ 이 한 마디로 뭉뚱그려진다. 그 순간 감정의 둑이 툭 무너지면서 정체 모를 눈물이 줄줄. 아니, 이게 울 일이야? 갱년기니? 볼멘소리를 할 법도 하지만 남편은 그러려니 해준다.
친구 중 국제결혼한 친구가 두 명 있다. 한 친구는 캐나다 남자와 했고 또 한 친구는 홍콩 남자와 결혼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좋아했던 나는 디카프리오처럼 잘생긴 외국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기도 했었다. 국제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던 나는 홍콩에서 모처럼 우리나라에 들른 친구에게 국제결혼이라 힘든 점이 있는지 물었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더라. 그래서 더 힘들고 그런 건 모르겠는데 딱 하나! 꿀꿀하다를 꿀꿀하다 말하지 못하는 거, 이건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해.”
친구의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북경어에 광둥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친구라 언어의 장벽 따윈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말이 통한다는 건 단순히 어휘력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꿀꿀하다를 다른 말로 바꿔봤다. 기분이 안 좋다, 우울하다, 착잡하다, 맥이 빠지다, 별로다, 메롱이다... 등등. 이 중 한 단어를 고르라면 고를 수 있을까? 나는 못한다. 꿀꿀하다는 저 모든 뜻과 뉘앙스를 품은 말이니까. 하물며 우리말로도 대체가 안되는데 외국어로는 어떻게 번역될지, 번역기를 돌려봤다.
나 꿀꿀해 -> I'm so down.
뭐, 맞는 말이긴 한데... 입체적인 말이 납작해진, 뭔가 밋밋해진 느낌이다. 역시 꿀꿀하다는 꿀꿀하다 일 수밖에!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마음이 백분 이해됐다.
“말이 통한다는 건 그 사람의 마음과 정서까지 헤아리는 것.”
말이 통하는 사람이 남편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남편은 꿀꿀한 나를 어설프게 달래기보단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종료시킨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나는 기다렸다는 듯 책과 헤드셋을 챙겨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애들한테는 늘 감정을 말로 표현하라 가르쳐놓고 정작 온몸으로 말하는 나는 뭔데? 살짝 미안했지만, 뻔뻔해지기로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형서점, 그 안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기분이 꿀꿀할 때마다 치르는 나만의 의식이 있다. 스위트 밀크티를 마신다. 힙합 음악을 듣는다. 책을 읽는다. 이 모두를 한꺼번에 할 때, 삼박자가 딱 맞아떨어질 때 나는 가장 쉽고 빠르게 행복해진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은 그곳에만 있다. 왜? 그 집 스위트 밀크티가 끝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스위트 밀크티는 혼자만의 달콤한 시간이다. 음악과 책, 그리고 스위트 밀크티 한잔이면 어느새 꿀꿀함은 자연 소멸된다. 기분을 태운 롤러코스터가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꿀꿀함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자 나의 감정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나는 결국 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짜증을 냈던 것인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하라 했거늘.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반성한 게 어디냐며 다시 한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다음부턴 예쁘게 말로 해야지..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니까.
국제결혼 안 하길 정말 잘했다. 어차피 기회도 없었던 건 안 비밀.
“나 오늘 기분이 몹시 꿀꿀한데 혼자 나가서 스위트 밀크티 한잔만 마시고 와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