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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Jul 17. 2020

어쩌다 안식년

어느 날 남편이 회사를 접었다

남편이 10년 넘게 출퇴근하던 사무실을 정리했다. 마치 오래 준비해 온 일인 듯 남편은 덤덤했다. 아니, 묵은 짐을 벗어던지는 것 같아 홀가분하다고도 말했다. 그만큼 남편에게 회사는 큰 짐이었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사무실 정리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남편은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직전, 안식년을 선언했다. 그동안 일만 좇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고, 사람들에게 지칠 대로 지쳤다며 1년 쉬면서 잃어버린 자신부터 찾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고도 했다. 처음 남편이 그렇게 말할 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면 힘나는 일보다 지칠 때가 더 많으니 으레 하는 소리려니 했다. 가끔 지칠 때면 넋두리처럼 했던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축 처진 남편의 어깨를 힘껏 두드리며 멋지게 큰소리치곤 했다.  


“그래, 까짓것 쉬어! 이제부터 내가 먹여 살릴게!”


그러면 남편은 피식 웃으며 다시 힘을 내어 달리곤 했다. 이번에도 잠시 주춤하다 말 줄 알았다.


일이란 게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법인데 특히 남편이 하던 일은 일의 특성상 그 차이가 심했다. 프로젝트 성으로 일을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일이 치이게 많다가도, 어떤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없기도 했다. 사람들도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프로젝트를 일로 성사시켜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늘 남편을 짓눌렀다.  그리고 갑과 을 사이에서 남편은 아슬아슬한 파도타기를 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만 그 파도에서 내려오겠다고, 더 이상 원치 않는 파도에 휩쓸리듯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넋두리가 아니었다.


남편의 안식년 선언이 있고 얼마 안 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회사 일에 관련된 이런저런 기대에 찬 계획들을 얘기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어떨까? 급한 마음에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 톤 올려 쉴 새 없이 얘기했던 것 같다. 겉으로는 “안식년 가자! “ 호기롭게 얘기했지만, 사실 내 속마음은 불안했다. 당장 아이들 학원비부터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불안이 커질수록 내 목소리도 커졌다. 그런 나를 말없이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남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두르지 마. 지금 그렇게 버둥거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남편의 말투에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아, 진짜구나! 남편의 마음이 완전히 굳은 줄도 모르고 나 혼자 열심히 남편의 마음에 삽질을 하고 있었구나!


암담했다. 돌이켜보면 위기의 순간들도 참 많았다. 10년 가까이 해온 일이 한순간에 떨어져 나가는 순간도 있었고,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도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했고 무슨 일이든 작당을 하지 않으면 안 됐던, 그래서 막연한 불안감에 밤잠을 설칠 때도 그때만큼 암담하지는 않았다. 20년을 함께 한 남편의 단호한 모습이 낯설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내 볼을 타고 흘렀다. 희로애락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 만 가지의 감정이 뒤엉켜 ‘암담함‘이란 단어로 압축됐다. 그리고 나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아주 대책 없이 안식년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나 몰래 들어두었던 적금을 꺼냈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아끼면 1년 정도 우리 네 식구 딱 먹고살 수는 있겠다 싶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돈이 해결되자, 나도 용기가 생겼다.


“그래! 까짓것 한 번 가보자!”


남편은 미뤄두었던 여러 일들을 했다.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바빠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며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계약 문제로 빼지 못했던 사무실을 정리했다. 대신 소호 공유 사무실로 짐을 옮겼다. 작지만 하늘 뷰가 끝내주는 곳이라 마음에 들었다. 남편도 나도 홀가분했다.


그리고 4년 가까이 흐른 지금, 뭐가 달라졌을까? 드디어 금연에 성공했고 열심히 운동해 살도 뺐다. 표정도 많이 밝아졌고 예전보다 많이 웃는 남편이 내 옆에 있다. 이제 남편이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 네 식구가 더 똘똘 뭉쳐 다닌다는 정도


새로운 뭔가를 찾았냐고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답할 수 있겠다. 결국 다시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가기 위해 서서히 준비 중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찾았다고 할 순 없겠다. 하지만 같은 일도 그때의 남편과 지금의 남편의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걸 찾았다 할 수도 있겠다.


결국 안식년은 기회였단 믿음이 생겼다. 남편은 늘 그렇게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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