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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날로그숲 Mar 03. 2021

내 나이가 위안이 되는 순간

생일맞이 리셋을 하기까지

생일을 며칠 앞두고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을. 이렇게 말하기는 좀 슬프지만, 나의 노화를 말이다.


딱히 무리라고 할만한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목구멍이 따끔따끔. 몸에 이상신호가 잡혔다. 이거 이러다가 열이라도 나면 큰 일인데 싶어 수시로 열체크를 했다. 아로마 오일을 손등에 바르고 킁킁거리며 틈틈이 후각 체크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종합 감기약을 먹으며 집에서 쉬었다. 다행히 약발 제대로 받아 감기 증상이 조금씩 나아졌다. 휴~ 코로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한시름 더나 싶었는데 이번엔 오른손 새끼손가락에서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


무심결에 오른손을 냉장고에 부딪쳤는데 새끼손가락 첫마디에 찌릿! 하고 전기가 흐르듯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마디가 툭 불거진 게 왼손 새끼손가락과 비교해도 확연히 부어있었다. 워낙 손으로 뭐든 만들고, 피아노 치길 좋아하고 자판 두들기는 게 일인 사람인지라 평소에도 손가락 통증 정도는 달고 살았는데 이렇게 붓기까지 한 건 처음이었다. 더럭 겁이 났다.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를 받았다. 그 결과가 꽤 충격적이었다. 손가락 뼈 사진은 그냥 보는 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진 속에 문제가 있다며 의사가 손가락 마디마디를 가리켰다. 손가락 마디와 마디 사이가 넓어야 젊고 건강한 관절인데 나는 거의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젊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관절, 다시 말해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했다.


“이거 나이에 비해 너무 이른데요.”


의사는 매우 안타까워하며 내게 말했다. 그 표정이 나를 더 가슴 철렁하게 했다. 내 손가락 뼈 사진 옆으로,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관계로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내 나이보다 두 살 적은 만 나이가 숫자로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딱 마흔 중반.


“벌써? 내가?”


생일을 코앞에 두고 연달아 몸이 아프니 몹시 우울했다. 게다가 퇴행성이라니... 내가 아무리 손을 많이 쓰기로 소니 퇴행성 관절염이라니. 물리치료를 받고 약국에서 조제받은 약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정말 목놓아 엉엉 울었다. 나이 들었다 생각하니 괜스레 더 서럽고, 억울했다.


코로나로 집콕하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니들펠트인형 만들기에 빠졌다가 뜨개질에 빠져 목도리를 세 개나 내리 떴다. 최고는 라탄 공예였다. 짚신을 삼듯 날대와 덧날대를 꼬아가며 연필꽂이도 만들고, 작은 바구니도 만들고, 컵받침도 여러 개 만들었다. 손가락이 잘 안 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재밌고 보람됐던 그 시간들이 급 후회됐다. 그리고 오래전 그 일이 생각났다.


카페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분이 지나가시는 것을 무심코 본 적이 있었다. 잘 걸어가시다가 갑자기 넘어지시는 모든 과정을 본의 아니게 지켜보게 됐다. 어디에 걸려 넘어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푹 고꾸라지는 모습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더랬다. 그 모습이 왠지 서글퍼 눈물이 났었다. 처음으로 노화에 대해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저런 걸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면 몹시 당혹스럽겠다...”


그땐 아빠를 생각하며 울컥했는데 생일을 앞두고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다니! 나는 몹시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더 우울했는지도.


그렇게 생일을 맞이했다. 베이킹이 취미인 큰 딸이 생일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줬고, 두 딸이 돈을 모아 산 선물을 내게 줬다. 큰 딸이 대표로 쓴 생일 카드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있었다. 건강하라는 대목에서 나는 또 울음이 터졌다. 어려서부터 울보로 통했던 나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툭하면 운다. 감성에 충실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세상천지에 울 일이 차고도 넘친다. 슬퍼도, 행복해도, 좋아도, 싫어도, 감격해도 나는 운다. 그런 나를 잘 알기에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도 동생이 핀잔을 줬다.


“아주 누가 보면 마지막 생일인 줄 알겠어.”


덕분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나도 웃음이 빵 터지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일단 퇴행성 관절염 따위는 뒤로 하고 나의 생일을 즐겼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한 생일 선물로 식기세척기를 통 크게 질렀다. 손 마사지기도 주문했다. 이제부터라도 내 손을 소중히 다루고 아끼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다. 주말 내내 남편이 나를 대신해 삼시 세끼와 설거지까지 책임져주는 호사를 누렸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군!


생각해 보면 내가 진짜 우울했던 건 나이에 비해 너무 이르다던 의사의 말과 몹시도 안타까워하던 그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생일도 지났으니 나이도 한 살 더 먹었겠다 40대 딱 중반에서 후반 쪽으로 한 칸 더 갔으니... 그렇다면 조금은 덜 이른 게 아닐까? 엉뚱하게도 나는 한 살 더 먹은 내 나이에서 위안을 찾았다. 딱 한 살이라도 덜 이르다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사람의 기분이란 참 마음먹기에 달렸구나, 새삼 깨달았다.


“내가 내 나이라 참 다행이다~”


그때 갑자기 고꾸라졌던 할아버지는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가셨다. 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다시 가던 길을 가야지 별도리가 없다. 그 사이 감기도 좋아졌고, 퇴행성관절염의 충격도 무뎌졌다. 마침 2월 마지막 날인 내 생일이 지나자 공식적인 봄의 시작, 새 출발을 알리는 3월이다. 생일을 기점으로 새로 싹 리셋한 기분이랄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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