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간들을 응원하며
말없이 앞서 걷는 남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일단 속으로 삼켰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편을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소위 크리스마스 대비용 소개팅을 했다. 상대가 연극영화과 학생이란 말에 나는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굉장히 잘생겼거나, 굉장히 못생겼거나. 과연 어느 쪽일지, 기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진 종로의 어딘가에서 소개팅남으로 남편을 처음 만났다. 맹렬했던 겨울 칼바람 속에서 그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서 있었다. 빨간 스웨터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그의 첫인상은 ‘청량하다’였다.
스물다섯 청년은 참 간단명료했다. 영화가 좋아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조차 몰랐던 나에게 그의 거침없는 발언은 묘한 믿음을 줬다.
크리스마스 대비 소개팅답게 우리는 연달아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롱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신촌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를 뚫고 나에게로 다가오던 그에게서 나는 빛을 봤다. 마치 해를 이고 오는 듯 온 세상 빛이 그를 비추는 듯했다. 콩깍지가 씌어도 아주 단단히 씌었던 그때. 속이 울렁거려 밥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그가 참 좋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기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의 나날들이었다.
소개팅 이후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고 그렇게 꼬박 2년을 만났다.
스물일곱 살이 된 청년은 여전히 참 간단명료했다. 졸업을 앞둔 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나와 함께 여행을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프러포즈라기보다는 제안에 가까웠던 그의 말은 또다시 나에게 믿음을 줬다.
만난 지 딱 2년째 되는 12월 23일, 그와 나는 친구들 중 제일 먼저 결혼한 용자가 됐다
그리고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꿈을 위해 살아도 봤고, 살기 위해 꿈을 접어도 봤다. 그리고 남편은 다시 출발점에 섰다. 왜 생각이 많지 않겠는가!
이렇게 지난날을 빠르게 훑어보니 남편의 행동엔 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이유를 알고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남편의 행동은 언제나 군더더기 없이 명료해 보였을 뿐. 젊었을 때는 그 이유를 찾기가 훨씬 쉽고 빨랐으리라. 중년의 가장이 된 지금은 예전만큼 간단명료하지만은 않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이유를 찾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 탓이겠지.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친구가 아르바이트하는 패밀리레스토랑에 놀러 갔다가 가족을 기다리는 중년의 남자를 봤다고 한다. 잠시 뒤 온 아내와 아이들을 맞이하는 그 남자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저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다고 했다. 그런 남자와 만나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인의 얘기를 듣고 로망은 결국 삶의 방향을 정하고 결을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남편감, 아니 결혼에 대한 나의 로망은 뭐였을까?
말없이 앞서 걷는 남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묻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지만 일단 기다렸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남편의 뒷모습은 뭔가 애틋하면서도 믿음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