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온 지 벌써 4개월 차가 됐다. 한국에서의 나와 가장 달라진 점은 완전한 아날로그 인간이 됐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쿠팡/배민 중독자였다. 온라인으로 옷을 산 적은 거의 손에 꼽으니 온라인 쇼핑을 즐긴다고 할 수는 없고, 쿠팡/배민 중독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분명할 것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항상 요리할 기력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배달의 민족을 켜곤 했다. 어쩌면 배달의 민족 어플 켜기가 내 퇴근 루틴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야근을 할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충 먹고, 일찍 집 가죠.'라고 하면서도 늦게까지 일하게 만드는 회사가 고약해 가장 비싸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다양하게 시키곤 했었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쿠팡은 어떤가. 한 달 4,900원이면 모든 물건이 무료 배송으로 또 하루 만에 도착하니 거의 모든 생필품을 쿠팡에서 해결했다. 생수, 세제, 생리대, 치약, 샴푸, 과일, 빵 등등.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게 되는 세상에서 굳이 시간을 들여 마트를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호주에 오면서 나는 지난 모든 습관과 이별해야 했다. 쿠팡과 배민이 호주까지는 배달해주지 않으니까. (배달이 됐다면 아마 똑같이 살았을 거다.) 그리고 모든 걸 오프라인에서 내가 직접 하기 시작했다.
모든 생필품은 퇴근길에 직접 구매했다. 울월스, 알디, 콜스, 케이마트, 동네 채소가게까지.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면 한 시간은 우습게 흘러있었다. 그리고 내 카트는 온갖 물건으로 가득해졌다. 호주는 마트 카트를 집 앞까지 가져갈 수 있는데, 만약 이런 제도가 없었더라면 내 팔은 마동석 님만큼 커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장을 보고 나면 집에 가서 열심히 요리를 했다. 맥주보다 저렴한 와인 덕분에 혼자 술을 마시는 날들도 자주 있었다. 요즘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온갖 레시피들로 가득한데, 그걸 보고 있으면 내가 이 생활을 얼마나 즐기는지 실감하곤 한다. 이렇게나 잘 먹으면서 더 잘 먹으려고 독학까지 하는 모습이라니. 4개월 만에 6킬로가 찐 이유가 납득이 된다.
처음에는 식재료가 배달이 된다는 걸 몰랐다. 그리고 호주는 '택배가 느린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돈을 아끼기 위해서 우버 이츠 어플을 깔지 않았다. (첫 구매 쿠폰 유혹도 이겨냈다. 이미 배민한테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어플을 까는 순간 수많은 돈을 써버릴 것임을 안다.)
이제는 식재료를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방법도, 아마존이 쿠팡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마트에서 쓰는 돈이 배달 음식 가격보다 높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아날로그적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마트는 공휴일이면 당연하게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6시면 문을 닫는다. 덕분에 라면으로 모든 끼니를 해결한 적도 있고, 감자칩과 콜라가 사고 싶어 잠 못 드는 날도 있었다. 이 정도 불편함은 조금 더 부지런해지면 될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일적으로 성장하거나 뭔가를 성취하는 시간 외 다른 것들을 등한시했었다. 요리하는 시간을 아껴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 믿었고 공과금 내기, 장보기, 청소 같은 티가 나지 않지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소한 것들에 시간을 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해결해 주는 서비스의 출시를 상상하며 현실이 되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더 잘 살아보려고 내 일상을 미루는 동안 내 삶은 티나지 않게 조금씩 무너져갔다. 나는 종종 외로웠고, 자주 무기력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성취에 목 말랐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야 할 일들에 내 삶이 끝나지 않는 게임같다는 생각도 했다. 내 삶을 등한시한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지금은 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동안 등한시 했던 일상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하자 내 하루가 충만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소한 행복들을 발견하게 됐다.
작년 겨울 나는 무너져 가던 내 삶을 일으키고 싶어서 잠시 쉬기를 택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