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보라 Sep 24. 2021

김치볶음밥

[내가 만든 요리에는 이야기가 있어]

김치볶음밥

 해는 중천에 떠있고 집에 오로지 나만 있는 시간.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오전 시간을 잠으로 보내는 건 별일도 아니다. 허물 벗은 뱀처럼 이불 밖으로 기어 나와 다 떠지지 않은 눈을 하고 주방으로 향한다. 식탁에는 일어나면 챙겨 먹으라고 둔  엄마의 사랑이 그릇에 담겨 있지만 영 입맛에 당기지 않는다. 뭘 먹기는 해야겠는데… 별 의미 없이 냉장고를 열어보다 제일 만만한 요리를 떠올려 본다. 김치, 계란, 밥 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그 요리. 김치볶음밥.


 한동안 티브이와 유튜브에서 빠지지 않고 나왔던 콘텐츠가 있다. 쿡방. 유명한 셰프들이 나와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 현란하게 요리하는 모습은 가히 고수들이 중국 무술을 선보이는 흡사 묘기 같았다. 내 집에는 존재하지도 않을 이름도 어려운 재료들로 그보다 더 어려운 이름의 요리들을 척척척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라면 끓이는 게 다 였던 나에게 요리는 내 영역이 아님을 느끼고는 했다. 그 쉬운 라면도 물 조절을 잘 못해 한강으로 만들어버려도 세상에는 남이 만든 맛있는 음식들이 밖에 널려 있으니 뭐하러 고생을 하며 음식을 한단 말인가. 나에게 요리란 그저 번거로운 일에 불과했다.


 날이 갈수록 쿡방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이제는 나같이 요리에 요자도 모르는 자에게도 너도 할 수 있어! 하며 손을 내밀어 주는 방송이 등장했다. 참 쉽쥬? 구수한 아저씨 말투 너머로 보이는 요리들은 제법 나도 따라 해 볼 만한 것들이 많았다. 이걸 요리라고 해도 되나? 싶을 만큼 쉬워 눈으로만 보아도 금세 외워지기까지 했다. 냉장고 안에 먹다 남은 배추김치를 보면서 한번 해봐?라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는 이미 다른 재료들이 없는지 눈으로 스캔을 하던 중이었다. 파 기름을 내면 더 맛이 있다던데, 야채칸을 주섬주섬 뒤져 들어있는 파를 꺼내고 냉동실에 밥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두었다. 도마까지 꺼내기는 어쩐지 거추장스러워 가위로 김치를 난도질을 하고 파도 썰어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파를 넣어 파 기름을 내보았다. 언제쯤 파 기름이 되는지 알 수 없어 달 큰 야릇한 향이 올라올 때쯤 김치를 넣어 함께 볶았다. 붉게 물든 기름이 팬 너머로 튀기 시작하고 노르스름하게 익어가는 김치를 바라보며 이게 맞는지 아리송했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설탕은 언제 넣는 거더라? 간장을 팬에 눌리면 불향이 난다고 했는데? 점점 뜨거워지는 팬에 냉큼 데운 밥을 넣고 볶아진 김치와 함께 이리저리 뒤집어 주니 그래도 봐줄 만한 모양새가 나왔다. 빛깔이 좀 흐리긴 하지만 계란 프라이까지 화룡점정으로 볶아진 밥 위에 올려 두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걸 내가 만들다니!


 핸드폰 카메라로 최대한 먹음직스럽게 인증샷을 남기고 한 입을 떠먹어보았다. 밖에서 먹던 맛보다는 심심하지만 썩 나쁘지는 않네. 한 그릇을 다 비울 동안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나에게 해주는 그럴싸한 요리의 인증샷을 날려 보냈다.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자랑을 하고 나니 어느새 요리에 대한 오묘한 용기가 뿔처럼 솟아나 있었다. 종종 해 볼 만하겠는데? 다음엔 뭘 해볼까? 두 손에 무언가를 해냈다는 썩 기분 좋은 감촉의 기억이 생생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누군가가 해주는 음식만 먹던 나에게서 아주 천천히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는 주체로 넘어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