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요리에는 이야기가 있어
결혼 초기에 이것저것 시도해 만들어 보고, 뭐든 곧 잘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 무민군의 모습만 보아도 의욕이 오르기도 했는데 … 점점 내 정체성이 집에서 매일 밥 하는 사람으로만 굳어져 가는 것 같은 분위기를 쉬이 넘기기 힘들었다. 요리에 대한 즐거움이란 것이 분명 있고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관심사도 나에게 있는 것 과는 별개로, 나라는 사람을 당연하게 ‘집에서 밥 하는 사람’으로 명명하려니 좀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그 타이틀은 별로 얻고 싶지 않았다. 거부권이 있다면 거부하고 싶을 만큼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온몸에 퍼졌다. 반항하는 마음으로 몇 차례 저녁밥 차리기 파업을 선언하고 남이 만든 음식을 욱여넣으며 나에게 그 이름표가 진하게 새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주인의 변한 마음을 냉장고 속 식자재는 기가 막히게 안다.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시들 생기가 없어져 갔다. 장 봐 둔 뒤 방치된 파는 끝이 말라가기 시작했고, 콩나물도 반찬 혹은 국이 되지 못한 채 봉지 안에서 다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었다. 제육볶음을 먹고 싶어 하는 무민군을 위해 사온 돼지고기도 김치냉장고 칸에서 차디찬 냉기 샤워를 꽤나 맞는 중이다. 제발 꺼내 달라는 그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한 채 나는 냉장고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20살 무렵부터 프랜차이즈 카페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주방이 내 첫 일터가 되었다. 내 손으로 꼼지락 거리며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어 좀 더 배워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관련 학교도 나올 만큼 나는 무언갈 손으로 직접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주제가 조금씩 달라지더라도 내 손을 거쳐가는 것들에 관심을 꾸준히 내비쳤다. 내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만들어낸 것들에 대해 나름의 자부심이 있기도 했다. 요리도 일종에 비슷한 결에 속했다. 일류 요리사를 꿈꾸는 건 아니더라도 접시 위에 차려지는 작지만 소중한 내 작품 같았다. 허나, 주부가 꾸려가는 살림살이에서 밥은 자부심 과는 다른 위치에 것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나에게 자동으로 주어진 임무. 주부 이기에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일. 식구의 끼니를 챙기는 일.
능력으로 보나 포지션으로 보나 내가 하는 게 맞기도 하다. 허나 나에게만 향하는 끼니에 관한 질문들. 언제, 어떻게, 얼마나, 잘 식구의 끼니를 챙기는가가 지금 혹은 앞으로의 나에게 때낼 수 없는 정체성을 대변하는 물음인 것 같아 속이 꽤 상했다. 가슴 한편에 서러운 마음이 크게 부풀어 터지기 직전까지 달했다. 내가 능력 있는 직장인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요리에 전혀 재능 없는 사람이라면? 왜 나에게만 당연한 걸까? 내 안에서 절대 해결되지 못할 것들을 부둥켜 앉고 점점 바다 밑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밥도 싫고 빨래도 싫고 청소도 싫고 주방도 싫어. 다 싫어.
대부분의 저녁을 배달 음식으로 돌려 막아 가면서도 기분은 썩 나아지지 못했다. 남의 손을 빌린 음식으로 주방을 떠나 있어도 그리 행복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했다. 잠시 요리를 안 하는 것뿐 여전히 주방이 내 일터임은 자명했다. 식재료도 이제 쓰이지 못하면 그대로 버려야 했다. 냉장고에 그동안 방치해 둔 재료들을 하나하나 꺼내 살릴 수 있는 부분들을 잘라 살려내고, 시기를 놓쳐 회생이 불가능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렸다. 칼로 도려내고 잘라내 쓸 수 없는 것들을 모아 보니 무게가 꽤나 무거웠다. 관심이 사라진 것들은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남아있는 재료들도 빨리 소진하지 않으면 같은 처지가 될게 뻔해 보였다. 미리 해둔 밥은 없고. 이리저리 재료들을 살펴보다 아래 찬장에 파스타 면이 보였다. 파스타를 해야겠다. 겨우 몇 알 살아남은 마늘을 전부 슬라이스 해 두고, 반쪽 남은 애호박을 꺼내 반달 모양으로, 겉이 물러 야구공만 해진 양파도 썰어두었다. 이것 만으로는 아쉬움이 남아 냉동고를 뒤지니 봉지 채 화석이 되어가는 냉동새우를 채굴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아낌없이 붓고 휘뚜루마뚜루 정체불명의 이름 없는 파스타를 만들어 접시에 담았다. 오일 코팅이 된 재료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 빛이 났다.
나 혼자 먹을 건데 너무 거 한가? 그러고 보니 매번 남편과 먹을 저녁만 신경 쓰느라 그동안 나 혼자 먹는 끼니는 잘 돌보지 못했다. 나를 위해 제대로 된 한 끼를 차렸던 기억이 흐릿하다. 식구는 나도 포함되는데 늘 나를 챙기는 일은 후순위도 밀렸다. 포크와 스푼으로 돌돌 파스타 면을 돌려가며 먹고 있는 이 한 끼가 귀하게 다가왔다. 찬찬히 꼭꼭 씹어가며 가득했던 접시를 비워냈다. 배가 따뜻하게 차오르는 포만감에 마음까지 충만해지는 기분이 감 돌았다. 내가 요리를 하고 싶었던 건 이런 마음 때문이었는데. 사소하지만 귀하게 여겨주는 마음.
밥 하는 사람,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밥을 하는 사람이 맞다. 그게 내가 갖고 있는 모습 중에 하나임은 틀림없다. 내가 두려웠던 건 나를 잃어버린 채 오직 주부로서 박제되어 가는 모습이지 않을까. 다양한 나를 잃어버린 오직 주부의 모습. 한데 그 주부도 영락없는 나다. 그렇다면 주부의 모습도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겨주면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내가 만든 요리에 귀한 마음을 담았다면 요리를 하는 나도 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