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메르주가
낮에도 시끌벅적했던 마라케시의 밤.
낮과는 비교할 바가 안된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시각각으로 기가 빨려 나갔다. 가게든 길목이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중간중간 메르주가로 가는 교통편이 있다며 호객꾼들도 등장했다. 방금 거기서 왔습니다만.
광장으로 가는 길에 265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어 호기심에 사 먹어봤다. 아마도 녹였다 다시 얼린 소프트아이스크림 맛. 265원은 녹았다 얼린 아이스크림을 먹어보는 체험비였다.
광장으로 들어서자마자 어디서 불난 줄 알았다.
어찌됐건 불이 맞기는 했지만.
얼떨결에 들어온 대축제의 장. 페즈보다 더 한 아수라장이 여기 있었다. 한쪽에서는 불놀이인지 음식을 굽는건지 연기가 자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닥에 물건들이 널려 있고 그리고 그 사이를 오토바이가 돌아다니고. 살면서 혼돈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적절하게 쓰이는 순간을 맞이할 줄 몰랐다.
여태까지 봐 왔던 모로코는 전부 꿈 같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마라케시의 야시장.
평생 들을 니하오와 아리가또를 다 들은 것 같은데 상인들 태세전환이 하도 빨라 오히려 웃음이 터졌다. 동양인이 보이기만 하면 앞다투어 냅다 니하오라 소리쳤다가 반응이 없으면 아리가또를 외치고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아는 아시아 단어를 되는대로 내뱉는 식이었다.
독일에서 들은 니하오는 그렇게 기분 나쁠 수 없었는데 여기서 듣는 니하오, 아리가또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물론 인종차별이 맞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너무나 판매 본능이 진하게 묻어나서 도리어 재밌었다. 이웃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이 나라에서 뭘 했던 거야?
먹거리 시장 쪽으로 가니 호객 행위가 훨씬 더 심해졌다.
호객꾼 중 하나는 아예 우리 앞을 가로막고 안 보내주려 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열심히 니하오를 외치다 돌아보지 않으면 바로 뒤의 여행객에게 헬로우를 외쳐댔다. 야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달팽이도 길게 늘어 서 있었지만 이곳에서 뭔가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식당들을 지나 생과일 주스를 파는 쪽으로 가니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게 상인들의 눈빛이 바뀌는 걸 목도할 수 있었다. 눈을 반짝이다 못해 번쩍거리며 이 가게로 오라고 손짓을 해대서 최대한 눈을 피해 정면만 보고 걸었다.
어차피 마지막 날 밤이겠다 저녁을 안 먹으니 주스는 하나 사 먹어볼까 싶어 무난하게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려고 하니 가게 주인이 다른 맛 시음을 권했다.
"이거 할까?"
"바꿔."
눈이 반짝 뜨였다.
바로 이걸로 세 잔을 달라고 했는데 작은 컵과 큰 컵 가격 차이가 애매해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주인이 흥정 없이 가격을 깎아줬다. 고맙습니다?
사실 아직도 저 주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다.
음식점들을 너머 어둑어둑한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녔다.
일행이 기념 자석을 사고 싶어 했지만 마라케시 특유의 느낌을 살린 걸 별로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대로 낙타 자석을 하나 고르고 이번엔 야시장의 반대 방향으로 가 보기로 했다.
마라케시에는 마차가 많다더니 광장 안에 대기 장소가 따로 있었다. 멋스러웠지만 말 냄새가 지독했다. 물건과 가판대로 터질 것 같았던 먹거리 시장과 달리 여기는 대로변을 따라 야자수가 서 있어 동남아시아 같기도 했다. 한 야시장 안에서 몇 가지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자 영혼이 탈탈 털렸다. 여행 마지막 밤이라 잠 못 이루지 않을까 싶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밤, 제법 꿀잠을 잤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
테라스로 올라오니 옆 건물에서 경 읽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푹 자고 나서 개운한 상태였는데도 어디든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곧이어 나온 이제는 익숙해진 모로코식 아침 식사. 전병 빵은 런던이 아니라 한국에 돌아가도 그리울 것 같다.
이렇게 마지막 숙소와도 잘 헤어지나 했더니 역시나 바로 넘어가는 법은 없었다.
전날 카드 단말기가 고장났다며 오늘 체크아웃을 하면서 결제를 하기로 했었는데 카드를 받은 숙소 직원이 예약 사이트에서 예약한 가격과 다른 금액을 결제하려고 한 것이다. 카드를 받자마자 바로 긁어 버리려는 직원을 멈춰 세우고 이거 가격이 왜 이러냐 물어봤더니 직원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우기기 시작했다.
고압적인 태도로 이상한 환율을 입력한 엑셀을 보여주며 이 가격이 맞다고 하길래 예약 사이트를 내밀고 옥신각신하다가 일단 나중에 돌아와서 다시 결제를 하기로 하고 짐을 맡겼다.
오래된 자동차가 많아서인지 바깥을 걷고 있으면 매연 냄새가 엄청났다. 비행기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아 마라케시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마조렐 정원에 가보기로 했다.
마라케시의 마이애미 같은 정원 입구.
마조렐이라는 프랑스 예술가가 지었고 입생로랑이 이곳을 무척 좋아해 사들였다는 정원이다. 모로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장료를 지불한 곳이었다. 선명한 코발트 색 설치물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외에 특이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했다. 선인장류가 많은 야외 식물원 같았는데 잠시나마 바깥의 소음과 매연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공간이었다.
날이 흐린데도 눈이 부시고 무더웠다. 모로코의 태양은 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게 분명하다.
피서할 겸 배를 채울 겸 근처 식당을 검색했다. 근처에 별점 5점짜리 식당이 하나 찍혔다. 근처에 마트가 있어 공항 가기 전 장 보고 가기에도 안성맞춤이라 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만찬.
2인 코스를 시켰는데 사장님이 센스있게 대추차를 세 잔 주셨다. 전채 요리, 메인 요리, 디저트까지 다 너무 맛있었다.
사장님이 은근슬쩍 시키지도 않은 물을 따라주며 강매하기는 했지만.
먹기 전엔 카드 결제된다고 해 놓고 먹고 나선 현금만 받는다고 해서 나 홀로 근처 atm을 찾아 돌게 했지만.
그래 놓고 구글 리뷰 남겨달라며 의뭉스레 웃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던 마지막 식사였다. 모로코에서 먹은 것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좋았다. 마트에서 웨하스를 쓸어 담고 나자 정말로 모로코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숙소로 돌아가니 직원이 실수가 있었다며 원래의 가격으로 결제를 도와줬다. 사실 환율로 바꿔 보면 얼마 안되는 금액이었지만 무시하고 고압적인 태도에 우리도 세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숨막히는 매연을 맡으며 택시를 잡으러 나왔다. 문득 히잡을 쓴 여성들이 앞선 도시들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국인이 많아서일까 더 도시라서일까? 메르주가에서 학교 가는 동생을 지켜보던 누나가 생각났다.
마라케시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아주 가깝다. 택시를 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웬 멋드러진 건물 앞에 도착했는데 설마 이게 공항인가 싶었다.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같았던 탕헤르 공항과 비슷한 모습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세련된 디자인에 정말 마지막까지 예상할 수 없는 나라라며 혀를 내둘렀다.
공항 앞의 사방이 뚫린 흡연실도 눈에 띄었다. 저렇게 천장까지 다 뚫어 놓을 거라면 굳이 흡연실이 따로 있는 의미가 있을까 했지만 꽤 고풍스러웠다.
시간이 꽤 여유 있다 생각했는데 웬걸 공항 안에 디르함 현금을 받아주는 곳이 별로 없는데다 대부분 음식점의 가격이 공항을 감안하고도 너무 비쌌다. 게이트 근처 매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공항 안 빵집 하나에서 마지막 남은 디르함을 다 털고 아슬하게 비행기로 입장했다.
마지막까지 정신 없었던 모로코 여행,
정말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