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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프로 Mar 10. 2024

중식도로 딸을 내려치려고 한 아빠

사건 현장 이야기 : 가정폭력


  밤 11시 45분. 여느 때와 같이 순찰차 의자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찰차는 112 신고에 대비하여 사건 발생 빈도가 높은 장소에 대기한다. 이를 거점근무라고 한다. 필자는 늦은 밤, 주거지가 밀집한 지역에 순찰차를 주차하고 조용히 세상을 관망하며 거점근무 중이었다.


  세상은 토요일의 마지막을 지나 일요일의 시작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침묵과 함께하는 필자만의 평화로운 시간도 일요일의 틈새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필자는 적막 속에서 안녕을 느꼈다. 그러나 그토록 평안하던 고요함은 112 신고시스템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힌 얇은 유리잔처럼 깨졌다.



코드 0 / 가정폭력 /  아빠가 칼로 저를 찌르려고 한다

  가정폭력 현장은 거점근무 장소에서 약 3분 거리. 코드 0은 112 요원이 신고자 또는 피해자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판단할 접수하여 하달한다. 이에 필자는 도로의 모든 신호를 무시하고 현장으로 내달렸다. 신고 접수 1분 후 도착한 현장은 단독주택이다. 주택에는 작은 앞마당이 딸려 있고 그 앞엔 검은색 철제로 된 작은 대문이 걸쇠로 걸려 있었다. 걸쇠를 제쳐 대문을 열고 앞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 당도했다. 112 요원이 무전기로 알려 준 주택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비밀번호를 1번 틀렸다. 필자는 속으로 '정신 차려'라고 되뇌며 비밀번호를 다시 눌렀다. 그 순간 누군가 집안에서 현관문을 강하게 밀어 연다.


  현관문을 연 남성은 적대적인 눈으로 필자와 동료 경찰관을 쏘아본다. 필자는 가장 먼저 남성의 손을 봤다. 손에 칼이 없다. 동료 경찰관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성의 신병을 확보했고, 필자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최악의 경우 신고자가 칼이나 다른 물건에 의해 심각한 상해를 입고 쓰러져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울고 있는 신고자를 발견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신고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진술을 청취했다.



아빠가 누워있던 제 몸을 누르고 중식도로 내려치려고 했어요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현관문을 연 남성은 신고자의 친아빠였다. 술에 만취한 아빠가 귀가한 다음 집안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등학생인 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평소 술만 마시면 강한 폭력성을 보이며 욕설을 일삼는 아빠에게 질린 딸이 아빠를 향해 "제발 좀 그만해"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이성을 잃은 아빠는 어딘가에서 중식도(날 길이 20cm, 너비 10cm)를 가져왔다. 이어 안방 침대에 누워 있던 딸의 몸을 누르고 중식도로 내려 찍을 듯 행동하며 "112에 신고하면 살려줄 테니 신고해라"라고 협박한 거다.


  경찰이 가해자의 신병을 확보하지 않고 현장을 떠나면 아빠가 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른다. 이에 필자가 아빠를 특수협박 현행범인으로 체포했다. 그러나 남은 문제가 1개 있었다. 주거지를 수색해도 스테인리스 야구방망이, 날을 벼르지 않은 도검, 여러 개의 식칼은 발견되었으나 중식도가 발견되지 않았다.



범행을 입증할 중요 증거물인 중식도의 행방

 

  경찰관 6명이 중식도를 찾기 위해 주거지 내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식칼이라면 모를까 중식도는 외관의 특징이 명확한 물건이다. CCTV가 존재하지 않는 가정집 내부에서 벌어진 협박 사건의 중요한 증거물인 중식도를 찾지 못하면 가해자의 범행을 입증할 길이 요원하다. 하지만 현장은 꽤 넓은 평수의 2층 단독주택이었다. 무작정 수색한다고 중식도를 찾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전략을 수정했다. 필자가 즉시 가해자에게 달려가 추궁을 시작했다.


필자 : 중식도로 딸을 내리찍을 듯 위협했죠? 칼 어디 있어요?

아빠 : 저는 칼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모릅니다.

필자 : 딸의 진술이 일관됩니다. 부인하면 그냥 갈 거 같죠? 밤을 세서라도 찾을 겁니다. 빨리 말해요.

아빠 : ....

필자 :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경찰이 집을 수색해서 칼을 강제로 압수하는 것과 당신이 순순히 범행을 인정하고 스스로 칼을 제출하는 것 중 어떤 선택이 당신의 처벌 수위에 도움이 될지 판단이 안 됩니까?

아빠 : 중식도는 집에 있습니다.

필자 : 위치를 직접 알려주세요.

    

  아빠는 손가락으로 주방 찬장의 가장 위쪽을 가리켰다. 얇은 검은색 사각형 종이 박스가 있었다. 종이 박스를 열어보니 중식도가 1자루 있었다. 피해자의 진술과 일치한 모양의 중식도였다. 특수협박의 중요 증거물을 확보했다.  

  

  필자는 아빠를 경찰서로 데려갔다. 딸은 여성청소년 수사팀에서 보호하였다. 이렇게 늦은 밤 벌어진 특수협박 가정폭력범죄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아빠는 유치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청수사팀 담당 수사관에게 피의자 신문 등 수사를 받고 처벌될 거다.



가정폭력범죄의 씁쓸함


  필자는 가정폭력범죄 현장에 나가면 녹슨 쇠를 혀에 댄 듯한 씁쓸함을 느낀다. 모르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다신 안 보면 그만이다. 당신이 길을 걷다가 웬 미친놈에게 빰 한 대 맞았다 해도 똥 밟았다고 치부하면 된다(쉽진 않다). 그러나 가정폭력범죄는 가족 구성원 사이 일어나는 범죄다. 국가가 인위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영원히 분리하기도 어렵고, 분리하다고 하여서 피해자의 벌어진 상처가 쉬이 아물지 않는다. 아니 벌어진 상처 사이에 피해자의 자기혐오가 바이러스처럼 퍼져 살을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잘못은 가해자가 하였는데, 상처는 피해자의 몸과 마음 곳곳에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필자가 본 가정폭력범죄 피해자의 눈빛은 대부분 똑같았다. 전의를 상실한 패전국의 군인의 그것과 같았다.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읽을 수 없다. 사람은 고통에 익숙해질 뿐이다. 경험이 누적된다고 하여 안 아픈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부디 가족을 사랑하길 바란다. 제발 가족을 때리거나 협박하거나 짓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찰이 아닌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한 명의 동료 시민으로서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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