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고 책임지는 능동적인 삶
여러분 우리는 불분명한 상대성 속의 불확실한 유한함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일단 상대성과 유한함을 수식하고 있는 말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불분명한
분명하다. - 2. 태도나 목표 따위가 흐릿하지 않고 확실하다. 3. 어떤 사실이 틀림이 없이 확실하다.
불분명한 = ~분명한.
= 태도나 목표 따위가 흐릿하다. 어떤 사실이 틀림없이 확실하지 않을 수 있다.
틀림없이 확실하지 않은 '상대성'
불확실한
확실하다. - 틀림없이 그러하다.
불확실한 = ~확실한.
=틀림없이 그러하지 않을 수 있다.
不(부, 불)의 의미에는 "확률, 가능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그 가능성의 의미가 확장되어서 "반대하는 부정이 아니라,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부'로 쓰이기도 하죠."
이번 이야기는 '상대성과 유한함'의 속성을 나타내는 '불분명한, 불확실한'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세계는 무한합니다. 유한한 것은 우리의 존재, 의식일 뿐입니다. 세계는 세계가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그 파괴된 세계로서의 무한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로 파괴된 상태로 무한함을 누릴 겁니다.
세계의 무한, 의식의 유한
위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 세상, 우리의 세상, 당신과 나의 세상에서 유한한 것은 오직 우리 개인의 인식뿐입니다.
세계는 무한합니다. 이 세계는 파괴되면 파괴된 채로 영원히 유지됩니다. 다만 우리의 '의식'은 유한합니다. 우리의 몸 또한, 파괴되면 파괴된 대로 무한하겠지만, 우리의 '의식'만은 유한하죠. 물론 언젠가 SF적인 해결책인 나타나 우리의 '의식'이 컴퓨터로 옮겨져 무한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유한성은 딱 80살, 100살까지 살고 죽는다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정확히 우리의 수명인 언제까지인지 모르겠지만 죽습니다. 이것이 언제 죽는지 모른 불확실성입니다.
또 사고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90~100살까지가 불확실성의 영역이 되고, ~60세까지 살아갈 확률이 100%에 가까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60세 이하에 죽을 수 있는 경우의 수. 사고, 질환 등의 변수가 불확실성을 만듭니다.
개념과 개성 ; 집단과 개인
A와 B, 세계의 공집합을 통념이나 상식, 문화에 따라 관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심리학은 이 '개념'을 통해서만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는 공집합이 되는 부분도 분명히 중요하지만, 공통된 개념, 상식에서 벗어나는 자기 자신만의 '생각'이 없다면 인형처럼 타인에 의해 움직이는 삶을 살 것이고, 만약 자기 자신의 세계가 비좁지만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세계를 아예 포기하거나 확장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고통받을 것입니다. 손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말이죠.
돌 같은 유한이 용암 같은 무한으로 뛰어든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돌처럼 점점 구체적으로 단단하게 굳어갑니다.
우리는 돌처럼 굳어가는 유한한 우리를 용암 같은 무한으로 던져 넣을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은 그 목적이 유한성에 갇힙니다.
무한한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것은 그 목적이 무한함에 향유됩니다.
이것이 문화, 철학이 "감동"으로 유전자 gene처럼 meme이 되어 살아나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문화, 철학, 과학 등 "나를 위한 것이 더라도 그 대상이' "세상"이 된다면 그 탐구는 미래로 유전될 수 있습니다.
이 "지성"의 활동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무한성"에서 불멸하며, 전달되어 왔고, 전달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합니다. 유한함 속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무한함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유한한 것을 사랑할 수도 있고, 무한한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무한한 신을 사랑하거나, 인류가 탄생시킨 무한한 기계적 신, 즉 문명을 사랑하거나, 인류의 투쟁심을 사랑할 수도 있죠.
유한한 당신을 사랑할 수도, 반려동물을 사랑할 수도, 나를 사랑할 수도 있죠.
우리 모두 무한한 것을 위해 살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대의라던가, 인류에 기여하기 위해서 무한한 것들을 위해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인류가 무한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인류에 기여하는 사람들은 그저, 인류가 무한하게 되길 바라며 인류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지속 가능 하길 바라는 것이죠.
이번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살 건가?
뭘 위해서? 누구도 욕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것을 위해서 사는 것에도, 무한한 것을 위해 사는 것에도.
다만 위기의식을 가지십시오.
당신의 의식이 유한한 것은 사실이며, 육체는 파괴되는 것으로, 엔트로피가 증가되는 방향으로 무한할 것입니다.
막연하게 당신의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유한한 것, 당신이 누리고 끝날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meme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당신의 gene이 경험하고 끝날 것들을 말이죠.
그것은 여러 가지 감정, 경험이 되겠네요. 부자가 되는 것도, 사랑을 하는 것도 전부 gene에서 끝날 것입니다. 좋아요. 당신이 선택했다면 응원합니다. 그러나 남들이 하니까, 뒤처지는 것 같아서, 그냥 막연하게 부러워서 그런 것들을 추구한다면 당신은 안타까움에 한 발짝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냥 별 뜻 없이 경험한 일에서도 무언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만 30대에 들어서고부터는 의도적 설계가 선행되게 인생을 꾸리세요.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인생을 운영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한한 것 gene의 만족을 쫒든, 무한한 것 meme의 만족을 쫒든 당신의 선택으로 인생을 밀고 나가세요. 선택하고 책임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습니다.
앞선 글의 "생존, 존재, 비전에 대한 위기의식"에 대한 보충이라고 볼 수 있고,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세계를 부수고, 세계를 창조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나의 일이다.
"원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정확히는 변화를 막기 위한 의도로 쓰이는 "원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창의력은 정답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혼돈에 풀어놓아야 해서 몸은 질서 잡힌 생활에 느슨히 묶어둔다.
혼돈을 체계적으로 탐색하고 탈출한다.
그것에 내가 매일 하는 첫 번째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두 번째 일이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무언갈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
살게 된다.
나는 믿는다. 꿈을 못 이룬 채 죽어도
끝내주는 내 상상은 살아남아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도전하게 할 것을
2021.04.08. 김동현
될지 안 될지 모른다고 시도도 안 하는 건, 정말 무책임하고, 위험하고, 위태로운 행동입니다.
철학자에 빙의해서 삶을 조목조목? 조금 큰 단위로 분해하며 위기의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봤는데,
글의 요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삶에서 리스크를 없애는게 가장 큰 리스크 입니다."
도전하고 극복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만족감과 감동을 느끼세요.
물론 물리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고통이 따르겠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