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협조 좀 부탁드려요. 집주인도 다른 세입자를 찾아야 보증금을 내어줄 수 있답니다"
세입자는 내가 왜!라는 말을 자주 했다. 자기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해서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책임질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건지 습관처럼 '내가 왜!'라는 말을 뱉었다.
'내가 왜' 라니. 네가 집을 보여주어야 다른 세입자를 구하고, 보증금을 받아 나갈 것 아니니? 보증금 받기 싫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 한다.
겨우 설득해서 손님을 모시고 집을 보러 갔더니, 이 집 부내가 난다.
아이들 방에는 비싼 교구들과 전집 책들이 진열되어 있고, 거실엔 로봇 청소기, 안마기, 없는 가전이 없다.
"어머. 중문이 멋지네요. 집이랑 잘 어울려요."
세입자의 떨떠름 눈빛과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뱉은 나의 멘트에 세입자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한다.
"저희가 설치했어요. 예쁘죠?"
'응? 잘못 들었나?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왜 자기 돈으로 중문을 설치하는 거지? 나중에 떼갈건가?' 의아하다.
상당히 비협조적인 세입자를 겨우 달래 가며 어렵게 어렵게 다음 세입자를 구했다.
이삿날.
집주인이 문서 하나를 들고 와서 나서 나에게 보여준다.
"소장님 이게 뭐예요? LH에서 이런 서류가 날와왔는데"
내용을 보니, 살던 세입자가 LH를 통해서 전세자금 대출을 했는데 이자가 미납이 되어서
만기일에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주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사모님,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주면 안 되고, LH에 보내야 한다고 되어있는데, LH에 전화하셔서 다시 한번 확인하셔요. 세입자에게 돈 내어주었다간 큰일 날 것 같은데요."
이삿짐을 다 실은 차량이 새집으로 출발을 하고, 세입자의 남편이 찾아왔다.
차는 외제차를 타고, 꿀벌그림이 그려진 명품 운동화를 신었다.
"보증금 언제 입금해 주시나요?"
집주인이 난감해하며, 서류를 내민다.
"보증금을 LH로 입금하라고 하시네요. 어쩌죠"
세입자의 남편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며,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보증금을 당장 자기 계좌로 넣으라며 화를 낸다.
집주인은 잠깐 통화를 하겠다며 자리를 비우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LH에서 보낸 편지에는 보증금 1억 원은 세입자가 아닌 집주인에게 청구할 테니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주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살벌한 내용을 살벌하지 않은 척 단정히 적혀 있었다. 집주인이 까막눈이 아니고서야 그 돈을 세입자에게 줄 리 만무하다.
"LH에 문의하셔서 보증금을 돌려받으셔야 될 것 같아요."
세입자 남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태파악이 조금 되었는지 남자 세입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나선다.
어쩌면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아서 LH에 돈을 갚지 않는 그런 야무진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아마 LH에선 밀린 이자의 연체이자까지 살뜰하게 챙겨서 가져갈 것이다.
세입자의 계획이 틀어졌다.
세입자가 살던 집의 짐은 모두 실려 나갔고, 새로 들어올 세입자의 짐이 도착했다.
외제차에 명품을 두른 부내나던 세입자가 새로 이사 갈 집은 보증금 천만 원에 월세가 백만원인 집이라고 들었다.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아파트였다.
설마... 보증금 천만 원은 있겠지.
설마... 보증금 천만 원이 없었다.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받아야 들어갈 집 잔금을 치는데, 집주인은 문서대로 세입자가 아닌 LH에 보증금을 모두 입금했다.
아마 LH에선 대출금과 밀린 이자등을 보증금에서 모두 회수를 한 후 남은 금액만을 세입자에게 내어줄 것인데 그 돈이 천만 원이 안되었는지 세입자는 저녁이 다 돼 가도록 이사 갈 집에 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잔금이 입금되어야 짐을 풀 수 있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새 집의 집주인과 부동산은 비번을 알려주지 않았나 보다. 손님 안내를 하러 가는 길에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는 여자 세입자를 봤다.
집 안내를 하러 갔을 때, 그렇게 도도하고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사람을 훑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하아... 어쩌자고. 남자든 여자든 둘 중 하나라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었으면 이 사달이 안 났을 텐데'
전세자금 대출 이자도 못 내는 사람들이 무슨 외제차며, 명품 운동화인지. 남의 집에 중문 설치 할 돈은 있는데 보증금 천만 원이 없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상을 사는 거야? 어린아이도 둘이나 있던데, 지금 그 아이들한테 필요한 게 비싼 교구와 장난감이야? 매달 월세 백만 원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 거야?'
"차는 벤츠나, 아우디, 비엠을 타고 오는데 보증금은 반드시 오백이어야 해. 천만 원은 안돼. 돈이 없대.
계약할 때 보면 집주인은 오래된 아반떼 타고 오고, 월세 세입자는 외제차를 타고 오지..."
나의 이야기에 어떤 친구가 말했다.
"이해 돼. 젊은 사람들은 아마 집은 멀리 있는 것이라고 느껴서 일거야. 자동차는 큰돈이 없어도 모두 할부로 살 수 있는데 집은 그렇지 않잖아. 집은 자기 능력으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서 그럴 거야."
"으잉? 아니 그럼 차를 사면 멀리 느껴지는 집이 가까워지나? 안 써도 되는 곳에 돈을 쓰다가 나중에 최소한의 주거비용도 없으면 어떻게 해? 차에서 숙박을 하려고? 그건...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아주 몹쓸 짓을 하는 거 아닌가?
사람마다 경제관이 달라서, 내가 감을 놔라 배를 놔라 할 것이 아닌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내 살길은 마련해 두고 써재껴야 지.
적어도 나 자신 또는 내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는 상황이 생기면 안 되는 거잖아.
뭐가 우선순위인지는 정확히 판단해야 하지 않아?
당장 보증금 천만 원도 못 구하는 사람들이 명품이 웬 말이며, 외제차가 뭔 말이야.
솔직히 한심하다고.
그러면서 또 월세는 제때 안내요. 집주인들이 내용증명 보내는 방법을 검색하게 만들지"
그 친구가 듣기엔 꼰대느낌 물씬 나는 말을 쏟고야 말았다.
왜 자신의 경제력으론 감당하지 못할 비싼 소모품을 사는 걸까. 부자로 보이고 싶어서?
요즘은 외제차를 탄다고, 명품을 두른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자로 인식하는 세상이 아니지 않나?
명품을 만드는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은 진짜 부자가 아니라, 부자 희망자 또는 부자인척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미래의 자신에게 빈자의 고통을 전가해 가며 부자인척 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예전에, 내 고객 중에 외제차 수리점을 하는 분이 계셨다. 그분 피셜에 의하면 외제차는 원룸촌에 제일 많으며, 그중엔 자동차 수리비를 제때에 주지 않고 애먹이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꼭 차가 필요하면 형편에 맞게 국산차 싼 거 사서 타면 되는 것 아닌가? 외제차는 수리비도 국산차의 몇 배라고 하던데...
그 돈 아껴서 보증금을 조금씩 늘려가다 보면 지금 당장은 멀리만 느껴지는 내 집도 살 수 있는 때도 온다.
현재를 살라는 말이 내 미래의 안전까지 담보로 맡기고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나.
사람들이 너무 겁이 없다.
내가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일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월세나 대출이자는 연체를 하면서 여행도 다녀야 하고, 좋은 차도 타야 하고, 비싼 옷과 신발도 걸쳐야 하고...
예전에 우리 엄마가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뒤에서 몰래 하던 험담이 생각난다.
"쎄는 짧아도 침은 질게 뱉는다 카드마는..."
혀는 짧아도 침을 길게 뱉어야 한다? 혀도 짧은 주제에 침을 길게 뱉으려 한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주는 느낌과 뉘앙스를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알뜰하게 아껴 쓰자는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거 못한다. 내 특기가 돈을 어디 쓴 줄도 모르고 흐지부지 쓰는 거라 나도 말할 자격은 없다. 다만 상식적일 필요가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