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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Jul 28. 2020

모닝커피를 내리며

아침 일찍 눈을 뜨는 경우가 나에게는 거의 없다.

타고난 잠꾸러기다.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합리화하기에도 좀 부끄럽지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학교 다닐 때도 직장인일 때도 지금도 나는 아침잠의 달콤함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진 않았다.

잠이 좋은걸 어쩌라고.

남들은 말한다.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나이 들면 더 자고 싶어도 새벽형으로 고착이 되면 서글퍼진다고들 말한다.

내 평생소원이 새벽 4시 기상 새벽형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 것인데 세월 속에서 더 천천히 기다리다 보면 내 소원도 이루어질 때가 올지 모르겠다.     


나를 아침에 눈뜨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불속에서 커피 향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귀찮지만 물을 끓이고 

귀찮지만 원두를 곱게 갈고 

귀찮지만 천천히 드립 할 때 

코 끝에 느껴지는 커피 향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다 보면 이불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악마의 유혹처럼.

아니 천사의 유혹이라고 해두자.     

비가 내리는 아침이면 커피 향기의 유혹은 치명적이다.

촉촉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기 위해, 환기를 위해 베란다 창을 활짝 열면 젖은 공기와 비의 향기가 기분 좋게 어우러져 집안으로 성큼 들어온다. 오늘의 커피를 선택하고 -가끔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있는 콩을 갈 때가 많지만-두 잔 분량의 원두를 핸드밀에 정성껏 담는다.

남편이 있을 때는 수동 핸드밀을 선택한다. 천천히 드르륵드르륵 맷돌처럼 돌아가는 소리도 아침잠을 깨우기에는 더없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힘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서 커피를 내릴 때는 전동 핸드밀을 사용한다. 아침부터 힘들게 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나태한 생각으로 만족감은 조금 떨어지지만 수동 핸드밀에 커피콩을 분쇄한다. 

쌩~~~

날카롭게 돌아가는 칼날의 소리가 솔직히 귀에 거슬리지만 뭐 어쩌랴 이 정도는 참아야 한 잔 커피를 신속하게 맛볼 수 있으니 꾹 참고 빨리 멈춰라, 얼른 갈아져라를 짧게 외치며 잽싸게 기계를 돌린다.     

갈색 드립필터를 뜨거운 물로 세척하고 분쇄된 커피가루를 정중히 옮겨 담는다.

소중한 의식을 치를 차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줄기를 돌린다.

맛있는 커피가 되어라. 

맛있는 커피가 되어라.

나의 소망을 담아서 천천히 돌리는 물줄기 아래로 찐한 커피가 드립 되는 것을 눈으로 감상한다.

오늘의 잔을 선택-이 또한 선택의 폭이 크진 않지만 몇 안 되는 잔 중에서 고르는 즐거움이 있다-향기부터 마시며 커피를 잔에 옮긴다.

여기까지 의식을 치르면 거의 절반은 커피를 마신 것과 동일하다고 봐야겠다.

식탁에 커피 한잔을 두고 천천히 한 모금씩 커피를 마시며 손에 잡히는 아무 책이나 한 권 펼쳐 든다. 독서는 정해진 분량을 꽉 채워 읽는 것보다 닥치는 대로 잡히는 대로 읽히는 대로 읽는 습성 때문에 식탁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책들이 있다.

두 세장의 책을 읽다가 마음에 훅 들어오는 문장이 있으면 얼른 옆에 끄적이던 노트를 당겨서 필사를 해본다. ‘음~~ 멋진 말이군. 기억해야겠어.’

하지만 돌아서면 어김없이 기억나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기억력은 하루가 다르게 흐려짐을 알기에....     


서글프다면 한없이 서글프지만

행복하다면 한없이 행복한 일상이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기억력이 감퇴되는 것도 삶의 일부이고 늙어가는 것도 삶의 일부인데 아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그렇게 우리는 세월 속에서 익어가듯 늙어가는 것일 테이 깐.      

오늘 하루도 거룩하게 커피 한잔을 내려놓고 식탁 앞에 앉아 있다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잠시라고 붙들어두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행복하다.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창밖에 젖은 공기가 그렇다고 답을 해준다.

살아있음이 행복하고 오늘이 주어짐이 참 행복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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