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몸이 아직 적응을 못하고 있다
온통 여름인 나라에서 한 해를 보내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한 겨울의 추위를 온몸으로 체감한다. 뼛속으로 전해지는 한기와 눈 덮인 산이 왠지 낯설다. 르완다와는 7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바뀐 낮과 밤을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맹 추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면 더 많은 날들이 필요할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모든 공간이 꽉 채워져 있다. 거실에는 책과 소파가, 냉장고 안에는 칸칸마다 테트리스로 잡아넣은 듯한 음식물로 가득하다. 부엌 싱크대와 수납장 안에도 그릇과 먹을 것들로 빼곡하다.
옷장 역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의 옷으로 틈이 없긴 마찬가지다.
르완다에서는 삶이 심플하고 단순했다. 당연히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이 있었고 여백이 많았다.
책상 하나가 없어서 식탁을 공부 테이블로 겸해서 사용했고 냄비와 세간살이도 한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였다. 음식과 반찬이 뭐가 있는지 냉장고를 열면 대번에 알아차렸다.옷장에 옷이라 봐야 여름 것이 전부고 긴 옷이 몇 벌이니 간소했다. 그런데 한국의 집으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넘치게 많아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를 정도다. 오래 둬서 먹지 않는 음식과 필요 없는 플라스틱그릇들을 버리고 정리하게 된다.
임시방편으로 “뚫어펑”을 사용했던 세면대 배수구와 하수구를 열어서 그득 쌓인 머리칼을 일일이 드러내고 청소한다. 피아노 하단과 냉장고 바닥 등 그동안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곳들을 청소기로 꼼꼼히 빨아들인다. 한동안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 하루하루 소일하고 있다.
변화가 필요해 보이는 딸의 방 배치를 바꿔 주었다.
침대를 다른 편으로 옮기면서 그동안 아무렇게나 싸아둔 옷가지를 정갈하게 놓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책상도 옮기면서 묵은 먼지들을 제거하니 딸도 반기는 분위기다. 아들방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냉기와 빛을 차단할 필요가 있어서 암막 커튼을 주문했다. 하나 더 받은 식탁이라 거실 끝에 어정쩡하게 놓아뒀던 것을 안방으로 들여놓고 책상으로 쓰기로 했다.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던 차에 식탁을 책상으로 용도 변경해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데스크로 활용하니 흡족하다.
이 추운 아침, 여전히 이른 시간에 깨어 출근을 준비하는 아내나, 방학이라 느지막이 일어나 겨우 아점을 먹고 학원과 이곳저곳으로 향하는 아이들을 대하니 마음이 든든하고 따뜻하다. 나의 오랜 공백에도 자기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 낸 모습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이제 이곳에서의 삶을 다시 고민하며 모색하는 중이다. 우선, 계절에 적응하면서 가장으로서 생업을 꾸려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마음은 늘 사람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나라의 현장에 있지만, 그곳에서 안정적으로 사역하기 위해서라도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것은 중요한 관건이다. 목회선교사가 아닌 경우엔 KCOC나 코이카의 지원이 아니고서는 가족과 함께 긴 시간을 외국에서 체류하며 사역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NGO의 직원이든 미디어 교육자로서든 또다시 기회가 주워진다면 좀 더 오랜 시간 현지에서 머물 생각이다.그러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알차게 준비하는 것에 마음을 두려고 한다.
마침 읽으려고 사뒀던 원서들이 보이고 다양한 책과 교재들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떠나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하며 익혀서 유익을 끼치도록 해야지. 마음을 다잡으며 커피포트에 올린 물과 돌리는 세탁기의 마침 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향긋한 르완다 원두가 날아가기 전에 고마움을 표하고 전해야 하는데,
날이 빨리 풀리고 몸과 마음이 쾌창해지기를......
표지 : 작가 tawatchai07/ 출처 Freep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