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퇴사 5일 전,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렇게 웃음꽃이 핀다. 여러 가지로 다사다난했던 제주의 2번째 직장생활은 결국 끝을 조금 빠르게 보게 되었다. 사주팔자가 바다, 바다, 바다인 내게 숲속의 직장은 험난한 등산길 같은 느낌이려나.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이직을 준비하기 위해 퇴사를 하게 되었다.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현재 직장은 역시나 퇴사 직전까지 인원 충당이 힘들었고 혼자서 카페 업무를 맞게 된 하루. 설날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한적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관광객의 숫자에 약간 풀어지려던 찰나, 자기는 11살이라던 여자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어린아이에 대한 적대감 레이더에 불이 들어오고 마음속에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곁눈질로나마 바라본 아이는 성큼성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내게 다가왔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촌 동생도 없고 아는 초등학생도 없기에 몇 년 만의 어린아이와 대화인지 기억도 안 난다. 못난 어른의 말에 상처를 입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해보고 살았던 나였다. 똘망똘망하고 큰 두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입에서 나올 단어들에 대한 기대감에 찬 표정은 나를 굳게 만들었다. 신기하게도 그 아이와 대화를 시작하면서 손님이 뚝 끊겨버렸고 1시간 정도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오네요. 너무 바빠 보여요. 왜 혼자 일해요!”
첫 질문이었다. 나를 위해주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순수한 호기심이었을까. 어린아이와 대화는 자꾸만 나를 의심하게 된다. 새하얗고 작은 눈덩이를 굴리다 보면 흙과 이물질들이 들어오면서 색이 변해버린다. 나는 그런 눈덩이가 되어버린 어른이기에 작고 오염되지 않은 눈덩이 같은 아이의 말에서 의도와 이유를 찾게 된다. 왜 혼자 일을 하냐는 아이의 질문에 무슨 대답이 어울릴지 고민하다가 “오늘은 혼자 일하는 날이에요.”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원이 부족해서 같이 일하는 직원이 다른 곳으로 배정받았다고 하기에는 그 아이에게 너무 어려울 수 있으니 말이다.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니 그 아이가 제주 출신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보고 쉬는 날이 있냐는 아이의 질문에 5일을 일하면 이틀을 쉴 수 있다고 했고 똘망똘망하던 아이의 눈이 갑자기 시들시들해지더니 자기 아빠는 무릉에서 펜션을 운영하는데 쉬는 날이 없다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의 감정에 이입하게 되었다. 모든 감정이 솔직하고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모든 감각이 살아있는 듯한 눈동자를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할까. 초점 없는 눈동자에 절인 나에게 봄바람이라도 분 듯 꽤 신선한 순간이었다.
1시간 가까이 아이의 질문에 답을 주고 나의 질문에 아이는 답을 주는 티키타카가 오갔고 나의 적대감 레이더는 금방 사이렌을 끄고 안정을 찾았다. 거짓 없는 말들과 꾸미지 않은 단어들과 순수한 문단을 듣다 보니 나의 감정과 마음이 정화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일하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지만, 오히려 내가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더 있고 싶다던 아이는 손을 흔들며 떠났고 나는 마감을 시작했다.
찬 겨울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던 요즘, 내 마음에도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오늘은 나에게 반성해야겠다. 잊고 살지 말자던 무구의 생각을 잊고 살았던 것. 추운 겨울에 얼어붙어 봄이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던 것. 무거워진 눈덩이를 억지로 더 크게 만들 필요는 없던 것. 순수라는 당위를 부정한 것. 이 모든 것들을 잊고 살았던 나에게 오늘은 혼 좀 내야겠다. 무릉에 산다던 아이는 나에게 무릉도원을 선물한 뒤 크리스마스가 지난 산타처럼 사라졌다.
감사합니다. 뒤 돌아 나가는 손님에게 매일 건네는 인사이지만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