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 씹어 먹는 아이 >
어린 시절의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서너 살 즈음인가 런닝에 팬티 바람으로 대문 옆에 기댄 저는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열심히 한 손으로 코를 후비는 중이었습니다. 코를 후비는 버릇때문에 가족들에게 종종 놀림을 받곤 했지요. 제 기억에도 어린 시절 저는 코를 꽤 열심히 팠어요. 가끔은 그 파낸 코딱지를 먹기도 했답니다.
낼 모레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코를 팠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낯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돌을 씹어먹는건 어떨까요?
돌이 참 맛나답니다.
송미경 작가가 쓰고, 세르주 블로크 작가가 그린 문학동네 그림책 <돌 씹어 먹는 아이>는 동명의 동화집 중 한 편을 그림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5회 창원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 동화집 <돌 씹어 먹는 아이>는 나를 대신해서 모든 것을 결정해주는 부모님과 다른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기 위해 혀를 사왔다는 '혀를 사왔지', 메달을 딴다든가 성취 지향적인 가정에서 사는게 힘들어 고양이 아이가 되고 싶어하는 '나를 데리어 온 고양이 부부'처럼 부모와 아이가 바라보는 다른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일련의 주제 의식에 <돌 씹어 먹는 아이>도 놓여 있습니다.
그림책 속 아이는 돌이 참 맛나답니다.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요?
입안에서 살살 녹아요.
돌을 입에 넣고 굴리면 웃음이 나요.
와작 씹어 먹고 나면 속이 시원해져요.
그림책을 읽는 내 입속에서는 돌에 묻은 흙이 꺼끌꺼끌 느껴지는 거 같습니다. 와작 씹는다는데 내 이빨이 와작 부서질 거 같아요. 코딱지를 한때 먹었던 처지임에도 돌을 씹어 먹는 아이가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들은 내놓고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저마다 '돌을 씹어먹는' 것같은 면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돌이 아니라도 이 책의 마지막에 나오듯 아빠가 좋아하는 흙이라던가, 엄마가 좋아하는 못이나 볼트라던가, 누나가 좋아하는 지우개처럼 말이죠.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우선 아이가 자신이 돌이 참 맛나다고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돌을 씹어먹는다는 건 그런 우리 사회가 그어놓은 '선'을 벗어난 행동과 습관,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선안에 살고자 하지요. 하지만 저마다 그 그어놓은 '선'에 걸쳐지거나 아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어떤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게 없다면 애초에 그 '선'이라는 걸 쳐놓지 않았겠지요. 구분할 필요가 없는데 뭐하려 선을 긋겠어요. 그러기에 내가 당신들과 다르다며 선밖으로 나간 자신의 어떤 부분을 '시인'하는 게 더욱 쉽지가 않아요. 다른 누구를 떠나서 내 자신이 먼저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돌이 입에서 살살 녹는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걸 부모님, 즉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돌을 씹어먹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첫 발이 용감합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사회적인 자아로서 페르소나가 있다면, 그 이면에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이타적이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그 내면에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그림자'가 숨겨져 있다고 하지요. 저마다 돌을 씹어먹는 면이 있는 거지요. 그런 면에서 <돌 씹어먹는 아이>는 돌을 씹어먹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안의 돌을 씹어먹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돌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요. 물론 부모님께 차마 말씀드리지도 못하고, 자신이 돌로 변할까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아이는 어항 속 돌로 인해 꿈을 꾸고, 냇가의 돌에 위로를 받는다고 말해요. 내 안의 그림자는 돌을 씹어먹는 것처럼 이상한 것만이 아닙니다. 아이처럼 그 돌로 인해 웃음이 나고 위로받는 엄연한 나의 일부분인 거지요. 융은 건강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내면의 그림자를 '자아'로서 통합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5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릴 거 같거든요. 젊은 시절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며 살았어요. 결혼을 하고 나서는 남들처럼 번듯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어요. 남들 사는 만큼의 경제적인 부, 남들이 키우는 만큼의 아이들, 늘 남들과 비교하며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제 삶에 한없이 자기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었지요. 번듯한 사회적 페르소나를 향해 저를 닥달할 수록 그 가면 안에 숨어든 제 마음의 돌멩이들이 덜그럭거렸어요.
불교에는 '심우도(心牛圖)'가 있습니다. 풀자면 내 마음의 본능을 '소'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어느 절이나 가면 벽화로 그려진 심우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우도의 첫 장면이 바로 '소'를 찾아 떠나는 겁니다. 소를 찾아야 구스르든 올라타든 하지 않겠어요? 내 마음의 소를 만나듯 아이는 돌을 씹어먹음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인정한 '돌'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저 다른 '습관'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정체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사고 방식, 다른 성격, 다른 삶의 방식 등등,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많은 문제들이 내가 가진 '돌을 씹어먹음'에 대한 '인식과 인정에서 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드네요. 우선 내가 나의 '돌'을 인정해야 남의 '흙'이나 '못, 볼트, 지우개'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부분 내 돌은 제쳐두고 남의 흙이나 볼트, 지우개를 손가락질하느라 정신없습니다.
며칠 전 자료를 찾다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를 만났어요. 말년의 달리는 말합니다.
'사실 나는 일생 동안 ‘정상성’이라는 것에 익숙해지는 게 몹시 어려웠다. 내가 접하는 인간들,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그 무엇이 내게는 혼란스러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심정적인 '동일시'의 감정이 울컥 솟아났습니다. 그런 저라서 돌 씹어먹는 아이에게도 공감 백배입니다. 광기의 달리, 돌 씹어먹는 아이와 같은 내 자신을 인정하는데 저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기에 송미경 작가의 <돌 씹어먹는 아이>가 더 반갑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책을 통해 '돌씹어먹는 자신'을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