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그림책>
며칠 전 수업을 하는데 학생이 묻더군요. 선생님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돌아보니, 전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이렇게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제 소망을 이룬 건가요.
또 다른 질문, 심리학 등을 공부하다 보면 결국 삶의 목표는 '나'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 새삼스럽더라구요. 한평생 무언가를 이루고 얻으려 애달프게 살아온 듯한데, 정작 내가 되고 싶은, 혹은 내가 성취해야 할 '나'라는 질문에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직업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었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가에 대해서는 새삼스러웠어요.
그래서일까요, 테레사 글라드가 만든 <산다는 것은>이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2023 볼로냐 쇼케이스 dPICTUS 아름다운 그림책 100에 선정된 작품으로 한국 학술정보(주)의 출판 브랜드 dodo가 펴낸 그림책입니다.
▲ 산다는 것은 © 도도
그림책은 작가 테레사 글라드가 인터뷰한 아홉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담담하게 엮어 갑니다.
욘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갔던 욘은 첫사랑마저 뇌종양으로 잃었습니다. 그 '죽음'과 '상실'의 경험은 이제 욘으로 하여금 '누구든, 무엇이든 구하고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도록 만들었습니다.
반면 뒤늦게 태어난 동생으로 인해 애증의 골짜기에 빠진 안데쉬는 결혼 한 지 30년이 지난 나이가 되도록 여전히 '나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습니다. '상실'에 대한 두 사람의 선택이 참 다르죠.
'나는 내 체취를 맡는 걸 좋아합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과 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인터뷰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이니 만큼, 많은 인물들의 서사, 그 실마리는 안데쉬처럼 그곳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벗어 놓은 옷과 양말 냄새를 맡는 딕은 괴상한 취미네 싶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 보면 그곳에는 불안한 가족 관계 속에서 돌봄을 받지 못했던 한 아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나쁜 짓'으로 해소하던 아이, 그 아이는 장미에서 '치유'의 향기를 맡습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체취는 '자존'의 향기입니다.
▲ 산다는 것은 © 도도
자신의 냄새와 장미의 향기를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 딕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세상에 던진 질문에 끝내 답을 얻지 못한 페르는 결국 세상을 향한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맙니다. '누구도 내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며 일 년 넘게 수염을 기르며, 운동도 하지 않고, 음식도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자기 안의 눈물 주머니에 천착해 있습니다.
'내면 아이'는 주요한 심리적 기제입니다. 어린 시절에 뿌리를 내린 삶의 화두는 종종 사람들의 전 생애를 지배하곤 합니다. 어린 시절이라지만 그건 어렸던 시절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본연의 숙제가 아닐까요?
가끔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산다는 것>에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고민하는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던 라쎄는 자신이 엄마와 여동생의 옷을 입어 보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빠가 된 라쎄, 그의 내면에는 아무도 모르는 리사가 함께 합니다.
▲ 산다는 것은 © 도도
그래도 라쎄는 자기 안에 '리사'가 있음을 인정했다지만, 토르는 자기 자신을 '카멜레온'이라 말합니다. 바이올리스트인 토르, 젊은 시절 가지고 있던 컵에 써있던 'man'이라는 단어를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걸었습니다. 그래서 일까 결혼도 하고, 부업으로 일하는 곳에서 동료들과 거친 농담도 주고 받으며 살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느끼곤 합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 '페르소나'는 사람들이 사회 생활을 하며 드러내는 외적 성격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로 쓰입니다.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주장'합니다. 아동복 브랜드 모델이었던 자신의 페르소나로 평생을 살아가는 마티아스처럼 말이죠. '페르소나를 통해 개인은 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반영할 수 있고 자기 주변 세계와 상호관계를 성립할 수 있게 된다고 하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종종 그 페르소나와 자아 사이에 괴리감을 느끼곤 합니다'(위키백과). 토르는 스스로 반문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때로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는 합니다. '
스렉코도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갑니다. '서커스'를 꿈꿨던 아이, 하지만 현재 그는 '의사'입니다.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쳇바퀴 같은 삶을 규칙적으로 살아내고, 홀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걸 제일 편안해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꿈속에서는 서커스단원인 스렉코, '불행하지는 않지만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요?'
▲ 산다는 것은 © 도도
누구라도 스렉코의 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삶이 어디로 흘러갈 지 어떻게 알겠어요. 때때로 질문을 던지고, 반문하며, 회의에 빠져보지만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삶을 살아내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프란시스는 말합니다.
'나는 일찍이 배웠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거나,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을.'
말라위에서 열 다섯 남매 중 하나로 태어난 그에게 의사는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포기하라 했습니다. 당연히 도움도 받지 못했지요. 하지만 그는 결국 의사가 되었습니다.
같은 직업을 가졌지만 스렉코와 프란시스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참 다르지요. 어린 시절의 아픔에 대해 다른 선택을 한 욘과 안데쉬와 딕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나'라는 숙제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는 라쎄와 토르는 어떻구요. <산다는 것은> 구인 구색의 삶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되짚어 보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들 삶의 길도 저 아홉 명이 살아가는 구비구비 어디 쯤인가에서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