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세상이 멈춘 사이에>
'코로나 팬데믹'이 언제인가 싶어요. 여전히 한편에서는 코로나 예방 접종을 하기도 한다지만,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외려 도드라져 보이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락다운'이 되었던 아픈 기억, 혹시나 또 다시 어떤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은 '기습'해 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것들만이 우리에게 남은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이렇게 반문할 지요. 이제 와서 언제적 코로나 팬데믹이냐고.
우리는 어떤 일을 겪으며 그 일로 인한 '상처'에 천착하고는 합니다. '트라우마'라는 말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 집요하게 우리 곁을 맴돌지요. 하지만 상흔만이 남는 걸까요?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기업 구글, 하지만 동시에 구글이 가장 많은 실패를 거듭하는 기업이라는 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글이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업인 건 바로 '실패'를 통해서 배움을 얻기 때문이다. 구글은 실패 정보 DB를 구축해 새로운 창의적 활동에 활용한다고 합니다. 사업적 실패만 실패일까요. 코로나 팬데믹은 전세계를 '락다운'시킨 인류사의 실패담이 아니었을까요.
영국의 타이니 오울(Tiny Owl) 출판사는 함께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록다운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나요?”라는 질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여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남아공, 포르투갈, 이란,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15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들의 록다운 생활에 관해 그림과 짧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세상이 멈춘 사이에, 반출판사, 2023, 부제 Tiny Owl 15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리는 슬기로운 코로나19 생활>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그림책으로 수집한 코로나 DB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세계가 락다운이 되기 전 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안드레이 파로토가 글을 쓰고, 루시아 데 마르코가 그림을 그린 <어떤 날은...., 나무 말미, 2023>이 펜데믹 이전 우리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아름다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날들, (중략)
잠시 눈을 돌리면 될텐데. / 아주 잠깐이라도.
이봐, 거기! 기다리는 동안, 창밖을 볼 수 있어? / 그럴 리가 없지!
<어떤 날은....>에서는 어떤 날 누군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그럴 리가 없'으니, 대신 세상이 우리를 멈추게 했습니다.
Tiny Owl 출판사 대표는 서문에서 말한다. 락다운이 시작되자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에 머물러야만 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 였다고. 이 역설적으로 '함께'였던 시간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된 것일까요.
매일 산책하는 시간은 경이로워요.
텅빈 거리를 보면 무척 슬퍼질 것같아(중략)
하지만 고요함엔 아름다운이 있어요.
싱그러운 초록빛이 가득한 장소들을 얼마나 많이 발견했는지 몰라요.
몇 년을 이 동네에 살았어도 여태 가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 제니 블룸필드, 영국
15명의 일러스트 중 무려 5명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산책'하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도 그랬어요. 시간을 내어 길을 걷는 '행위'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일인이었어요. 그 시간 동안에 차라리 책을 읽거나 조금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지요. 하지만 팬데믹으로 '시간'이 남아돌고, 그로 인해 '불안'이 스멀스멀 솟아오르자 뭔가라도 해야 했어요. 흐르는 물과 계절마다 바귀는 초록이들을 보며 산 자락이 보이는 곳까지 무작정 걷곤 했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산책'이 주는 기쁨에 기꺼이 나를 맡깁니다. 하늘이 맑은 날은 이제 제게 '걷기 참 좋은 날'입니다.
바깥에 못 나갈 거면 차라리 바깥을 안으로 들여오기로 마음먹었죠.
(중략)멋진 까페를 상상해 봤어요.
(중략)우리 거실에 헬스장과 요가원이 있다는 상상도 했죠.
(중략)정원과 씨앗 심기도 떠올려 보았어요.
집에서 계절이 바뀌고 새 일상이 움트는 걸 보았답니다.
- 사라 반 동겐, 네덜란드
이른바 '홈가드닝'과 '홈까페', 그리고 '홈트'라는 이제는 일상이 된 단어들의 시작이 그러고 보면 '팬데믹'의 기간이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소일 거리로 하던 텃밭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젊은이들의 '취미' 생활로 변모해갔습니다. 책 중 이란의 에산 압둘라히처럼 '피고'라는 애완견을 키우며 그 덕분에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애완 식물까지 그 지평을 넓혀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식물을 키워 재테크도 한다네요.
영국의 케이트 밀너는 빵을 잔뜩 굽기도 하고, 인도네시아 출신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김장을 하고, 김치 토스트, 김치 볶음밥, 김치볶음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채웠다니, 그림책 속에서 발견하는 K 문화에 어깨에 으쓱해집니다. 늘어가던 1인 가구, 소중하게 나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한 끼를 만들어 먹는다는 '트렌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코로나 때였네요.
락다운 동안 나는 세상과 이야기 나누며 시간을 보냈어요.
조금 다른 방식으로요.
- 켄 윌슨-맥스, 영국
안나 도허티는 화상으로 축하도 하고, 파티도 했답니다. 이란의 나히드 카제미 도 가족 친지들과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영국의 제니 듀크는 '잘 자요'하고 포옹하는 화상 문자를 보냈다는데. 생각해 보면, 펜데믹이 아니었다면 '줌'이라던가, '화상 통화'와 같은 문명의 이기에 이렇게 쉽게 익숙해졌을까 싶네요. 그래도 얼굴을 맞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락다운'이 이루어졌고, 막상 '화상'을 통해 마주하니, 그 화면에서도 서로의 감정과 생각이 '소통'될 수 있다는 새로운 경지를 발견하던 시간, 덕분에 '문명의 이기'에 대한 거부감과 낯설음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네요.
서로 다른 그림체와 생각을 가진 15명의 일러스트레이들의 작품이지만 말 그대로 '함께'의 이야기가 되고, 동시에 인류가 얼마나 '회복탄력성'을 지닌 위대한 종족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덕분에 내가 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 반추해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말 그대로 '덕분에' 많은 것들이 변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었네요.
그렇다면 이제 팬데믹을 넘어서 다시 돌아온 일상의 시간은 어떨까요? <어떤 날>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라고, 그러면 생각지 못한 선물이 당도할꺼라 말합니다. 어느덧 우리는 또 달리기만 하는 걸 아닐까? 다시 한번 숨을 고르고 하늘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