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소설] 가족
주란의 추락사고가 난 그날 아침, 한 통의 인터폰 전화가 경비실로 걸려왔다. 자신을 아파트 주민이라고 밝힌 한 중년 여성은 아파트 화단에 사람이 누워있는 게 보인다며 가보라고 했다. 경비원은 6개의 동으로 이뤄진 아파트 건물 화단을 모두 수색한 후, 마침내 누워 있는 주란을 발견했고, 경찰에 신고했다.
CCTV는 엘리베이터 내부에만 설치돼 있었다. 사고 직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성재의 표정이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없었다.
14층 높이에서 추락하면 사람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습니까, 형사가 성재를 심문했다.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재가 답변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차분했지요, 형사가 물었다. 성재는 자신을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소개했다. 그는 주란이 스스로 뛰어내리는 걸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하성재는 주란을 태운 구급차로 도착한 한빛 병원에서 환자가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그의 말 그대로 의료차트에 받아 적었다. 검안의는 이를 참고 삼아 시신의 외상을 살펴봤다. 그는 주란이 자살을 시도했다 믿었고, 부검이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검안의 의견서는 당일 오후 담당 검사에게 전달됐다. 검사의 지휘 아래, 경찰은 사체인수인계서를 작성해 유족인 성재에게 주었다. 주란이 사망한 당일 저녁, 시신은 성재에게 인계됐다. 그가 주민등록부상 주란의 가족이었으니까.
이튿날 오후, 경찰이 신혼집을 수색하러 갔다. 그런데 주란과 관련된 물품들, 심지어 양말이나 속옷 같은 의류조차도 전혀 찾지 못했다. 전날 밤, 집으로 돌아온 성재가 모든 유품을 불에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성재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뒤늦게 부검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주란의 시신은 세상에 없었다. 경찰은 피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를 진행해야 했다.
성재가 주란에 대해 경찰에 말한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는 주란이 심한 우울증이 있어서 방안에만 있었고, 부엌일도 하지 않았으며, 밥도 먹지도 않았고, 씻지도 않아서 냄새가 났다고 했다. 마치 미친 여자처럼 하루 종일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아내에게 평소 불만은 없었습니까, 최 형사가 심문했다. 아내가 결혼 전에는 성관계에 적극적이고 잠자리에서 애교도 많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잠자리를 거부해서 불만이었습니다, 성재가 답변했다. 아내가 왜 왜 잠자리를 거부했다고 생각합니까, 최 형사가 심문했다. 아내가 생리 중이었습니다, 성재가 답변했다.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최 형사가 심문했다. 화가 나서 몇 번 쥐어박았습니다, 성재가 답변했다.
경찰은 자백을 근거로 하성재를 폭행죄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후 성재는 주란의 아버지에게서 미리 받아 놓은 양형 탄원서를 검찰에 제출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 쪽지 보냈습니다. - 사마리아
밀알봉사단 카페에 올린 민정의 게시물에 댓글이 달렸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말대로 쪽지가 도착했다.
검안 자료, 진료기록이나 부검 자료, 구급일지 등을 제 아이디와 연결된 메일로 보내주시면 검토하고 의견 드리겠습니다. 다만 익명으로만 가능합니다. - 사마리아 드림
민정은 자료를 정리했다. 진료기록과 구급일지가 누락돼 있었다. 이 형사에게 자료 요청을 했다. 그는 애시당초 증거자료로 채택되지도 않았다면서 직접 병원에 문의하라고 했다.
다음 날 일찍 원주 한빛 병원 원무과를 방문했다.
“운이 좋으시네요. 박주란 님의 의료기록이 며칠 후 폐기될 예정이었습니다.”
법률적으로 의료기록은 10년 보관 후 모두 폐기된다. 주란의 의료기록은 이미 폐기 자료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민정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정은 사마리아에게 자료를 발송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에게서 답변이 왔다.
제가 발견한 내용은 법의학 분야 전문가라면 누구나 추정 가능한 상식입니다. 우선 이 내용을 토대로 고소의 이유를 작성하여 검찰에 제출하면 검경이 국과수에 직접 문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실명으로는 직접 증언을 하거나 진술서를 작성하여 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친구 분의 명복을 빕니다. - 사마리아 드림
구급일지에는 주란이 ‘7층에서 추락’했으며 ‘자살’했다고 적혀 있었다. 구급대원은 가족의 현장 진술에 따라 일지를 작성한다. 그러므로 ‘7층에서 추락했다’와 ‘자살’이라는 말은 현장에 있던 가족의 진술일 게 분명하다. 주란이 거주하던 곳은 7층이 아니라 14층이다. 사고의 원인이 ‘자살’이 맞는다면 ‘14층에서 추락’이라고 적혀있어야 한다. 14층에서 추락할 경우 '두개골 골절에 의한 뇌출혈'이 반드시 동반된다. 그런데 주란의 차트에 기록된 엑스레이 촬영 결과와 검안의 의견서, 두 곳 모두 두개골 손상이 전혀 없다. 추락했을 때 두개골 손상이 없는 높이는 4층과 10층 사이다.
사마리아는 주란이 7층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실었다. 천파창은 둔기에 의해 폭력을 당했을 때 생기는 피멍이다. 그는 주란의 왼쪽 팔꿈치에서 발견된 천파창은 추락 전에 가혹행위에 노출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민정은 문득 사고 당일 받았던 구급대원의 문자를 떠올렸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주란은 이미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구급차 안에서 민정의 핸드폰 번호를 구급대원에게 알려줄 수 있었던 걸까. 민정은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기억납니다. 그 여자분, 의식은 거의 없었는데도 오른손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구급대원은 구급차 안에서 주란의 오른손을 펴주다가 꾸깃꾸깃하게 접힌 쪽지를 발견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펼쳤고 거기에 메모가 있었다.
제가 아프게 되면 가족에게 알려주세요. 010 8765 4321
그건 민정의 전화번호였다.
“가족... ”
민정의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고소를 준비하는 동안, 민정은 마치 꽁꽁 얼어버린 겨울왕국에 외투도 없이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롭고 힘들었다. 누가 도와줄 사람이 있겠어, 부정적인 마음이 더 컸었다. 어깨를 짓눌러왔던 차디찬 무력감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굉음소리를 내며 전진해오던 공소시효의 공포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주란을 잃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민정은 서럽게 울었다.
구급대원은 한참 동안 민정의 울음소리를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고 안타까워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남편 분이 지나치게 침착했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병원까지 줄곧. 그래서 10년이 다 됐는데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 구급대원은 그게 성재의 전화번호라고 생각했다.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성재가 말렸다. 구급대원은 혹시 친정집 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성재 몰래 문자를 보냈다고 했다.
마치 퍼즐을 짜 맞추듯이 은폐됐던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민정의 눈앞에 주란의 사고 직전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주란은 자살하지 않았다. 아파트 베란다에 줄 같은 것을 잡고 매달려 있다가 추락했다. 무엇이 주란을 위험을 무릅쓰고 베란다를 통해 외부로 탈출하도록 만들었을까? 집에서 나오고 싶다면 현관문을 이용하면 된다. 주란이 현관문으로 탈출을 못한 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다. 주란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있었던 이유도 분명해졌다. 외부와의 소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주란은 집안에 갇혀 지냈고, 필사적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리라. 탈출에 실패할 것에 대비해 주란은 민정의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만약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주란은 첫 번째 가족인 민정에게 제일 먼저 연락이 가길 원했다.
사건번호 20190123
주란의 사망사건은 새로운 사건번호를 얻었다. 민정은 하성재를 감금치사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감금치사의 공소시효는 10년이다.
글/ 사진: 박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