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사람
고양이를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고양이에게 받았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작았고, 고양이라는 생명체가 너무 신기하고 귀여웠기 때문에 내 눈은 온종일 아기 고양이를 따라다녔다. 고양이는 역시 예민했다. 미세한 움직임에도 귀가 쫑긋했다.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고, 미세한 물 분자에도 움찔하는 고양이를 보고 과거의 내가 이따금씩 떠올랐다. 당시 나는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생각을 곱씹고 있었는데 생각이 많던 내게, 엄마는 내가 '너무 생각이 많다'고, '예민하다'고 '좀 덜 생각하라'라고 했다.
‘예민함’은 내게, 80% 정도 부정적 어감으로 다가온다. 20%의 '섬세하고, 센스 있고, 감각적이다' 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예민함’에 대해 다수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니, 내가 나서서 좋은 점도 있어요! 부정적으로 생각 마세요!라고 나서서 주장할 마음도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저 ‘예민해요’ 하는 순간 ‘이 사람 좀 까다롭겠다’ 하며 내 말이나 행동에 프레임이 씌워질 것 같아 내 입으로 내 예민함을 밝힌 적은 없는 것 같다.
예민하면 일상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많긴 하다.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외부의 신호에 쉽게 지치고 피로해한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맡고, 더 잘 따가워한다.
그런데 고양이를 보니 딱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예민한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역시 예민하구나, 얘가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내가 좀 더 조심해야겠다,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얻었다.
'아, 내 예민함이 어떤 나쁜 가치가 아니구나, 그냥 하나의 특성인 거구나. '
내가 고양이의 예민함을 그냥 고양이를 이루는 하나의 사실로 인정하듯이 내 예민함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 가족에게는 물론 친척들에게도 내가 고양이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큰 화제가 된 모양이다. 우연히 닿은 이모와의 연락에서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우리 딸이 고양이 참 좋아하는데 네 고양이 보고 싶어 하더라. 틈만 나면 고양이 카페 가고 동네 고양이랑 놀고 그래.”
내게는 사촌동생인, 이모의 딸이 뭔가를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내게는 너무도 따스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모와 사촌동생의 관계가 부러웠다.
딸의 선호를 알아채고, 그걸 존중하고, 지지해 준다니. 나는 그런 경험이 없다(적어도 내 기억에는). 물론 성장과정에서 수많은 지지들을 받았겠지만 이렇게 표면적으로 나의 선호를 인정받고, 존중받고, 지지받은 기억이, 가족으로부터는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렸을 때 나는 고구마를 참 좋아했는데 특히 고등학교 때 달디단 호박고구마를 많이 좋아했었다. 그러다 스무 살 이후로는 타박타박한 밤고구마를 더 좋아하게 됐다. 이 사실을 여러 번 밝혔는데도 우리 엄마는 여전히 ‘너 호박고구마 좋아하잖아~’라고 하신다. 처음에는 호박고구마가 아닌 밤고구마라고 정정을 했지만, 여러 번 반복되자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걸, 엄마라는 중요한 존재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엄마와 나는 다른 개체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호박고구마로 기억해주시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이제는 엄마의 이해를 크게 바라지 않게 됐다. 이해를 받는다면 그대로 좋은 거고, 받지 못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이해시키는 게 이제는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불가능하기도 하고.
각자의 자리에 각자가 있으면 되는 거지, 누군가의 이해를 바랄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다만, 내가 내 자신을 잘 이해해주면 충분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