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퇴 사유는 '손녀 돌봄'입니다

빈둥지에 앉아 깨달은 것들, 교직과 육아 사이에서 허우적대던 그때

by 해림

오늘 나의 조퇴 사유는 '손녀 돌봄'이다. 요즘 젊은 교사들은 하루 2시간씩 육아시간을 쓰기도 하지만, 나 같은 중견 교감에게 그런 여유는 없다. 다행히 방학 중이라 큰 부담 없이 조퇴를 신청하고 서둘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사위가 미리 일러두었는지, 아이는 불쑥 나타난 할머니를 보고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가 준 사탕을 내밀며 껍질을 까라고 당당히 명령한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딸에게 급한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구원투수가 된다.


현관에 들어서니 백일 된 둘째를 보던 이모님은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다. 큰손녀에게 간식을 먹이고 작은 애를 어르는 사이, 큰손녀가 쉬가 마렵다며 바둥거리더니 결국 화장실 앞에서 실례를 하고 말았다. 평소엔 정해진 시간만 보던 영어 방송도, 오늘은 할머니에게 손가락 열 개를 펴 보이며 이만큼은 봐야 한다고 협박한다.


둘째는 잠이 오는지 연신 앙앙거렸다. 딸과 사위가 쓰는 세련된 아기띠를 해보려다 사용법이 헷갈려 휙 던져버리고, 익숙한 옛날식 포대기를 꺼내 아이를 업었다. 포대기 안에서 전해지는 아기의 온기가 등에 착 달라붙었다.


퇴근한 딸이 들어설 때 재빨리 TV를 껐다. 손녀도 눈치가 빤해 많이 본 것을 숨기려는 듯 시치미를 뗐다.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린 아이들에게 이제 할머니는 안중에도 없다. 갑작스러운 임무 해제에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 손녀를 하원시켜 오던 길에 나는 잠시 몽상에 잠겼다. '내가 만약 지금의 젊은 엄마라면 어땠을까?'

오후 2시 30분, 육아시간을 신청하고 여유롭게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아이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기고, 어린이집에서 만든 종이접기 작품을 자랑한다. 나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잡고 따뜻한 집으로 향한다. 미리 준비해 둔 맛있는 간식을 먹이고, 함께 책을 읽어주는 저녁. 남편이 일찍 귀가해 나를 도와주고 둘이서 함께 아이들을 씻기는 풍경.


한껏 감상에 젖어 두 딸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늘 손녀를 하원시켜 보니 예전에 엄마도 너희를 일찍 데려오고 싶었는데, 학교 일 때문에 그러지 못했네. 너희가 그렇게 싫어하던 종일반에 오래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해."


나의 절절한 사과에 큰딸은 대뜸 대답했다. "엄마, 그렇게 미안하면 앞으로 아이들 좀 더 자주 봐줘. 이번 일요일 결혼기념일 외식 때 애들 부탁해!" 괜히 감상에 젖어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내 귓가에는 출근할 때마다 유치원 앞에서 악을 쓰며 엄마를 찾던 작은딸의 울음소리가 쟁쟁하다. 어두워진 유치원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딸들의 쓸쓸한 뒷모습은 여전히 내 마음을 아리게 하는 아픈 손가락이다.


노심초사하며 키운 두 딸은 이제 제각각 가정을 이루어 떠났다. 나는 이제야 '빈 둥지'에 앉아 아이들이 곁에 있어 좋았던 그때를 그리워한다. 교직을 버리고 온전히 아이들만을 선택했다면 달라졌을 결과를 상상해 보기도 한다.


한쪽으로는 교직이라는 직업을, 다른 쪽으로는 두 딸의 손을 붙잡고 허우적거렸던 세월. 그 시절 일하는 엄마였던 나에게는 모든 것이 힘겹고 부족했다.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큰딸도, 머지않아 엄마가 될 작은딸도, 의사와 검사라는 고된 직업인으로 살아가며 자신의 유년 시절 속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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