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no de Santiago 1일차, 생장~론세스바예스
"시작은 기대와 설렘이 담겨 있다. 순례길을 걷고자 전 세계에서 생장 피에드포르로 모여든 순례자들의 얼굴에서 기대가 가득한 활기를 느낄 수 있다. 눈으로 인사하는 표정에서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표정이 가득하다. 자! 이제 출발이다!"
프랑스길의 출발지인 생장 피에드포르에 도착해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에 해야 할 3가지 일을 나는 먼저 했다. 첫째는, 순례자 사무실에서 크레덴시알(credencial, 순례자 여권)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려면 여권이 필요하듯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순례자 여권이 꼭 필요하다. 순례자 여권이 있어야 순례길의 숙소인 알베르게에 묵을 수가 있고, 순례 완주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여권에 스탬프(sello)를 찍어야 한다. 둘째는, 많은 순례자들이 묵기를 원하는 55번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하는 것이다. 순례자 여권을 만든 후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순례자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숙박비가 가장 저렴한 공립 알베르게는 대부분 이 층 침대가 있는 남 여 혼성 도미토리(dormitory)로 구성되어 있다.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에 온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남 여 순례자들과 같은 방에서 자는 것이다. 순서를 기다리는 줄에서 한국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나도 침대를 배정 받았다. 방에 들어서는 그 날 묵는 순례자들의 2/3가 각국에서 온 남성들이다. 산티아고 여정의 첫 날이어서 남성들과 같은 방을 사용한다는 것에 은근 당황하였으나, 하루 이틀 지나면서 어느덧 남 여 혼성 도미토리에 적응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셋째는, 순례길을 걷기 위한 배낭을 정리한 후, 여행 캐리어를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미리 부치는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짐 이동 서비스가 두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례길에서는 필요 없는 짐(캐리어)을 출발지인 생장에서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동해주는 서비스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매일 매일 도착할 알베르게에 무거운 배낭을 미리 보내는 동키(donkey) 서비스이다. 나는 이번 순례길에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스페인의 마을과 자연을 즐기면서 걷기 위해 이 두가지 이동 서비스를 모두 이용하기로 했다.
2024년 4월 30일, 드디어 순례길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생장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니 왼쪽에 성당이 있다. 이번 순례길의 주제가 기도길이니, 성당으로 들어갔다. "모든 걸음 걸음에 함께 하여 주소서! 어렵게 낸 시간입니다. 아프지 않고 모든 길들을 최고의 경험으로 누리게 하여 주소서! 간절히 구하는 기도에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여 주소서!" 비장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나와서, 순례길을 알려주는 노란 화살표를 따라 길을 걷는다.
첫째 날 넘어갈 피레네 산맥(1450m)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다. 프랑스 마을인 생장 피에드포르를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 스페인 마을인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게 된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날의 날씨이다. 그래서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를 가는 순례길은 두가지 길이 있다. 주요 길인 1450m의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은 날씨가 좋을 때 걷는 길이고, 태풍이나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우회해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생장에서 만난 한 순례자는 이번이 두번째 순례길인데 우회길로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첫번째 순례길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거센 비바람이 불어서 엄청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일기예보는 좋은 날씨라고 하는데도, 피레네 산맥의 날씨는 변덕스럽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나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길로 걷는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이 세상에서 인생을 50년 넘게 살아보니,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우리 가족의 건강이, 우리 자녀의 건강한 성장이 우리의 계획대로 되어 지지 않았다. 우리가 계획하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큰 창조주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 순례길에서 내가 계획할 수 없는 것이 날씨인데, 순례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날씨이다.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 길)의 첫째 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는 더더욱 중요하다.
나는 피레네 산맥을 넘는 5시간 동안 파아란 하늘과 하얀 구름과 산들산들 바람과신록의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들꽃을 즐기면서 춤추듯이 걸었다.
피레네 산맥 중턱에 알베르게가 하나 있다. 이름은 오리손 알베르게. 순례자들에게 이 알베르게는 정말 중요하다. 비바람이나 눈보라로 날씨가 너무 험악해서 더이상 걷기가 힘들 때, 산맥을 넘다가 발을 다쳤을 때, 갈증이 심하거나 허기가 질 때, 이 알베르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쉼터이다. 빵과 커피를 먹으면서 피레네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작은 배낭을 내려 놓는다.
중국의 사상가 장자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로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을 했다. 1000m가 넘는 깊은 산 중턱에서 바람을 벗삼아 아름다운 경관과 날씨를 즐기는 한 두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자연 안에 들어와 있는 '물아일체'를 느꼈다. 빌딩과 차와 사람이 가득한 도시에서의 일상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행복이었다. 자연이 주는 평안이었다. 높은 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오리손 알베르게에서 쉬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많은 순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마다 각자 이 순례길을 걷는 이유와 목적이 다르겠지만, 모두들 이 순간 자연에서 느끼는 행복과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산을 넘을 때 무릎 관절을 위해서 등산 스틱은 필수이다. 산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스틱 사용이 더욱 더 중요하다. 이번에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 스틱의 중요성을 엄청 느꼈다. 그래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자마자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스틱 사진을 예쁘게 찍었다. 그리고 침대 배정을 받기 위해 론세스바예스에 있는 수도원 알베르게에 갔는데, 한 신부님이 나오셔서 너무 늦게 도착해서 남은 침대가 없다는 안내를 하신다. 택시를 불러줄테니, 묵을 수 있는 알베르게가 있는 다음 마을로 가는 게 좋겠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신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순례자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다음 마을인 비츠카렛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짐을 푼다. 짐을 풀면서 조금 전까지 나와 한 몸이었던 스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을 되돌려보니, 론세바예스에서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부랴부랴 택시를 타면서 의자 위에 고이 두고 탄 것이었다. 다시 론세스바예스로 갈 수 없으니,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잘 사용하기를 아픈 마음으로 기도해본다.
이렇게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잃어가면서, '상실의 미학'이라는 아름다운 가치를 몸으로 배웠다. 아꼈던 물건의 상실이 순례길을 걷는 것(여정의 목적)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과 나의 상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획득이 될 수 있다는 엄청난 '상실의 미학'이다! 너무 움켜 잡고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히려 느슨하게 잡아서 자연스럽게 흘러보내는 여백의 삶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