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쌤이 도와달라며, 당신이 책임져
6. 봉쌤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나저나 너희 계획서 말이야. 누가 작성한 거야? 너희는 아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당황한 나범이와 선생님들의 얼굴을 보자 나범이를 제외한 아이들이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살피다 무슨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그렇다면 나범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과는 상의 없이 계획서를 작성했다는 말인가?
“얘들아, 너네 무슨 죄지었어? 왜 고개를 숙이고 있어. 고개 들어. 어깨 펴고.”
난 아이들의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었다.
계획서에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담았는지 아니면 통과만 되면 그만이라는 선생님들의 계획에 따라 쓰인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나범아, 계획서 너와 팀원들이 만든 거야? 솔직하게 말해줄래.” 나범이가 눈을 내리깔고 우물거린다.
“선생님들이 도와줬어요. 선생님도 보셨겠지만 아이들이 만들 수 있는 정도의 계획서가 아니라서요.”라는 윤선생님의 말에 놀랐다. 그녀는 항상 침착하고 부드럽지만, 바른 생각으로 용단 있게 행동하는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전에 와서 나범이에게 해준 이야기들은 아이들과 절충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였는데. 아이들하고 상의는 해봤어?”
나범이가 조용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못 하고 있다.
“계획서는 중학생이 썼다고 하기엔 너무 잘 썼어.”
그제야 나범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취지도 좋아. 지역 농산물을 이용한 음식을 지역 음식 축제에서 선보이고 싶다.”
나범이와 아이들을 한번 돌아봤다. 나범이가 살짝 웃는다.
“허투루 배우지 않고 제대로 배워 봉사활동을 하겠다. 이 대목이 제일 마음에 들어.”
역시 아이들이다. 잘했다고 칭찬하니 좋다고 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활용해 홍보한다. 선생님은 너희 나이 학생들이 유튜브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 중에 하나야. 너무 좋은 아이디어지.”
어느새 나범이가 밝게 웃고 있다.
“그런데 선생님, 선생님들이 봤을 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래도 말수 없는 선생님들이지만 이젠 아예 입에 밀랍을 붙여 놓은 것 같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웅성거린다. 그리고 한마디가 들렸다. 아주 또렷하게.
‘계획은 수정하면 돼요. 선정된 게 중요하지.’
아! 지역신문 한편에 아이들 사진이 나오면 되는 거구나.
어느 개그우먼 이 말 한 '왜 자꾸 씨부리 쌋노.' 저 선생님 때문에 생긴 말이지 않나 싶다.
“너희들은 계획서대로 배우고 익혀서 지역 음식 축제에 나갈 수 있겠어?”
아이들이 고개를 숙여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
“계획서이라는 건 너희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일을 계획하에 정확히 적는 거야. 통과를 위한 수단이 아니야. 적어 냈으면 안 되더라도 노력할게요라는 말이 나와야지. 너희 다 할 수 있겠어?”
선생님도 아이들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계획서는 계획서일 뿐이고 돈 받아서 1년 잘 놀면 되는 거였다.
“얘들아, 기술·가정실 (이하 기가실)에 가 있을래. 선생님 조금 있다가 갈게. 나범이는 아이들과 계획서에 들어있는 내용을 아이들과 이야기해 봐.”
아이들이 우르르 도망치듯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정적이 드리우고.
얼음이 다 녹아 미적지근해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나 냉동실에서 얼음 꺼내도 돼?”
“커피 새로 타줄까?”
“나야 좋지.”
드르르륵 드르르륵 커피머신이 돌아가고 새로 갈아지는 커피 냄새가 온몸에 뭉쳐있던 열을 식혀주는 듯했다.
“난 쟤들이 걱정이야.”
“누구? 문제아 3인방?”
“집중도 못 하고, 심란하고, 수업 시간에 잠만 자고.”
“반 인원이 총 3명인데 그동안 선생님들은 뭐 했어. 완전 과외고만.”
“말을 안 들어 처먹어.”
“요리는 잘할 거야. 6학년 때 같이 해보니까 선생님들 우려와는 다르게 잘하던데.”
“아! 그건 그렇고, 나 계획서 보고 깜짝 놀랐다. 휘황찬란함은 있는데 동아리에서 하고 싶은 구체적인 내용이 뭐야?”
봉쌤은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고 윤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저희도 그 부분이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계획서 있는 내용 중 무엇을 하실 생각인데요?”
“봉사활동 같은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내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축제 나간다는 얘기로 계획서를 도배했던데.”
교무실에서 다시 말이 들려온다.
‘그냥 대충 가르치지, 요리사 될 것도 아니고.’
이것이 선생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내가 교무실을 향해 눈을 흘기며 엉덩이를 들썩거리자 봉쌤이 내 팔을 잡으며 개미 목소리로 “시원하게 커피 마셔.”하고 팔을 끌어당겼다.
"누구여?"
"모른척해."
날아가는 새를 잡아다가 저 선생님 머리 위에 올려놓고 똥 싸라고 쓰다듬으며 맛난 벌레를 잡아다 먹여 주고 싶다.
“아니, 350만 원에서 나에게 168만 원 주고 남은 돈으로 나머지 실습은 할 수 있겠어?”라며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때는 너희도 무언가 대책이 있을 거 아니야.’라는 눈빛을 선생님들에게 내리 쏘았다.
“그냥 통과되라고 쓴겨? 봉쌤은 아예 이일에 신경도 안 썼지?”
“나야 신경 쓰려고 했지.”
윤 선생님이야 선생님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까라면 까야하는 처지고, 계획서를 제출해서 떨어지는 것보다 붙어야 선배 선생님들 볼 낮이 있으니 그렇다 치자.
“난 이 상황이면 못할 것 같은데. 그냥 나에게 줄 돈으로 아이들과 더 좋은 재료 사다가 만들어 먹는 건 어때?”
요리 선생님 불러 놓고 폼이나 내는 것보다야, 아이들의 동아리인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면 음식 축제에 나갈 수 있다며 아이들이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요.”
“그건 나범이 생각이지요? 다른 아이들 생각도 들어봐야죠.”
또다시 조용해졌다.
그적막을 내가 깨 줬다.
“그럼 돈 줘.”
두 선생님의 두 눈이 동그래져 튀어나올 듯 바라본다.
교무실에서 웅성거린다.
“뭐 내가 말이야 지금까지 남는 돈 없이 수업해 주니까. 지금도 그럴 것 같지. 전에야 일회성 수업이 많았으니 그랬다 치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특별예산 편성해 줘. 그럼 할게. 나도 차비는 있어야지.”
난 선생님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봉쌤이 나보고 와서 도와달라며. 책임져"
"왜 갑자기 나보고..."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입을 삐쭉인다.
왜? 봉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명히 대처하고 헤쳐나가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