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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임 Aug 17. 2023

할아버지가 잡고, 할머니가 굽던. 박대. #8

글쓰기 연습

오늘 저녁 메뉴는 박대·죽순조림.    


 박대는 내가 좋아하는 생선 중 하나다. 예전과 비교해, 불법 중국 어업 선박을 비롯,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박대 어업 물량이 적어지지만, 찾는 고객이 많아져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원래 박대는 아귀나 물메기, 꼼치처럼 잡히면 버려졌던 생선이었다. 예전엔 서대는 알아도 박대를 모르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배우 김수미가 방송 ‘수미네 반찬’에서 박대 요리를 하면서 ‘이게 뭐지?’라는 반응으로 박대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급기야 가수 화사가 ‘한 끼 줍쇼’ 프로그램에서 손가락을 쪽쪽 빨며 박대 구이를 맛있게 먹었던 통에 내가 좋아하는 박대가 갈수록 더 비싸진다.


내가 박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어부였고 내 베프였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여섯 딸에게 줄, 생선을 잡아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 두셨다. 외가댁에 자주 가던 나에겐, 큼직하고 멀쩡한 생선이 아닌 작고 부실한 생선만 구워 주시던 외할머니에게, 내가 투덜거리기 시작할 즈음 할아버지 내 몫으로 크고 실한 박대와 장대를 잡아 오셨다. 가끔 할아버지가 잡으시던 쥐치도 반건조 상태로 구워 먹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할머니는 박대를 살짝 말려 밀가루를 톡톡 묻혀 콩기름에 노릇노릇 바삭하게 튀기듯 구워 주셨고, 장대는 비린 맛없이 얼큰하고 개운한 매운탕으로 끓여 주셨다. 특히 잘 구워진 박대는 몸통 가시를 제외하고 나머지 잔 가시까지 씹어 먹으면 더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때론 작은 박대를 반건조해 튀기듯 구우면 척추 뼈까지 먹을 수 있어 귀찮은 머리 그리고 가시와 뼈 바르는 수고는 필요 없다.


여섯 딸 중 하나도 아닌  내가 외조부모님과 가깝다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여섯 딸이 심부름꾼이라는 역할을 나에게 주었다. 나의 역할은 운전 면허증을 따면서부터 시작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조부모님 댁으로 심부름을 가는 것이었다. 하도 자주 가다 보니 본가보다 한 시간 반을 고속도로를 운전해 가야 하는 외가가 가까운 듯 느껴졌다.


뭍으로 나오신 외조부모님을 모시러 군산에 도착했던 어느 날, 여섯 개여야 하는 짐 보따리가 일곱 개로 늘어나고, 모든 짐의 크기가 동등했다. 평소엔 나의 부모님 집으로 가는 보따리가 두 배로 컸었는데, 그 꾸러미가 줄어들어 있었다. “하나는 니꺼.”라고 무뚝뚝하게 말씀하시는 할아버지, 역시 나의 단짝 친구다. 결혼하고 분가한 나에게도 생선 한 보따리가 생겼다.


한 시간 반을 운전해 우리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 넷째와 막내 이모가 하사품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다. 나의 첫 하사품 개봉 시간, 낙지, 장대, 아귀 그리고 잔뜩 들어있는 박대, 거기다 할머니가 만든 젓국 한병, 갯벌에서 캔 바지락과 바지락 젓. 나의 보따리가 막내 이모 하사품보다 컸다.

 “내 것은 왜 서진이 것보다 작아?” 7살 많은 막내 이모가 불만을 내보이자. “인자 시작했은께 필요한 게 많지. 서진이는 젓갈만 있어도 밥 먹는 애니께 나둬.”하며 내 편을 들어주는 할머니. 난 우리 할머니 가슴 만지고 큰 사람이야, 하고 말하고 싶지만, 막내 이모는 딸이다.


날 딸처럼 아껴주시던 외할아버지는 내가 이태리 유학 중 돌아가셨다.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날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얼굴이 다가오면서 전화도 안 한다며 야단을 치기에 깜짝 놀라 일어났더니 학교 기숙사, 난 침대에 누워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여기저기 했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수업 중간중간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다가, 오후가 돼서야 남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장례식장이야.”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왜 전화를 하지 않았느냐고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엄마와 통화를 했다. 엄마의 말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처럼 장례식에 왔다가 다시 못 돌아갈까 봐, 전화를 안 하셨다는 이야기였다. 20대 초반에 엄마 병세로 내가 영국으로 다시 못 돌아간 이야기를 하시는 거였다. 60년을 할아버지와 같이한 할머니가 걱정됐지만 가 볼 수 없는 처지였다.


이태리에서 돌아왔을 땐 외로워 보였지만 쨍쨍하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내가 시드니로 유학을 가고, 부지런하고 정정하던 할머니가 몇 년을 버티시다 치매가 왔다. 내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땐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깔끔하고 단정하셨다. 외갓집에 들어서자 할머니가 “우리 서진이 왔네.”라며 이름을 불러주고 안아주었다. 날 알아보신다.

항상 까맣게 염색하던 머리는 하얀 백발로, 안 그래도 너무 날씬한 할머니가 더 날씬해졌다. 외조부모님의 심부름꾼 역할은 끝이 났지만, 나는 틈만 나면 외가를 찾아가 할머니의 하얀 머리를 쓸어주었다.


이젠 우리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나와 반띵해 주시던 할아버지도, 엄마 몰래 바지락 젓을 챙겨주시던 할머니도 돌아가셨다. 지금도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생각이 나는 날이면 눈물이 난다.  

  

 냉동실에서 꺼낸 박대가 또 외조부모님을 생각나게 한다. 내 가슴이 찡하도록 아리니 콧물이 난다. 박대를 물에 담가 놓으면 비린 맛이 날듯해, 쟁반에 납작한 스탠 망을 올리고 그 위에 박대를 올려 밀봉한 뒤 냉장실에 넣어둔다.      

콧물을 닦고, 올봄 잔뜩 따서 삶아 놓은 죽순도 꺼내 해동을 시작했다. 죽순도 물에 담그지 않고 실온에서 반 정도 녹으면 냉장고로 옮겨 놓는다.     


나머지 재료인 ‘무’ 여름 무는 단맛보다 매운맛이 많이 난다. ‘조선호박’ 제철 호박은 숭덩숭덩 잘라 고춧가루와 새우젓을 넣고 끓이기만 해도 달콤하다. ‘노지 양파’ 단단하고 무르지 않으며 매운맛보다 단맛이 높다. 10cm 정도 길이 무는 껍질을 제거하고 호박 1/4은 물로 씻기만 해 손가락 두께로 썰어 놓는다. 껍질을 벗겨 씻은 양파 1개도 굵직하게 썬다.    


조그만 양념 볼에 새우젓 반 큰 술, 고춧가루 두 큰 술, 어장 반 큰 술, 간장 반 큰 술, 젓국 반 큰 술, 마늘 한 큰 술, 생강 한 작은 술을 넣고 잘 섞어 한 20~30분 정도 한쪽에 놔둔다.      

넓적한 냄비에 물을 꽉 짜낸 후 굵직하게 찢은 죽순을 깔고, 무도 올리고, 박대를 나란히 깔아준다. 그 위에 양파를 올린 후 쌀뜨물을 박대가 올라온 높이까지 붓고 불을 켠다. 끓을 때까지 강불을 유지한다.  

    

끓기 시작하면 냄비에 있는 국물을 양념장에 한 국자 정도 넣어 잘 섞는다. 남은 호박을 올리고 잘 섞인 양념장을 조금씩 조림에 풀어준다. 생선이 들어간 음식은 갑자기 차가워지면 비린 맛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며 넣어준다. 양념장이 골고루 섞였으면 맛을 보고, 조금 더 간이 필요하면 새우젓이나 어장, 간장, 젓국 중 하나를 선택해 추가하고 단맛을 원하면 보리 엿이나 설탕을 넣어준다. 하지만 국물이 졸았을 때를 생각하면, 처음엔 약간 싱거운 맛이 좋을 수도 있다.  

    

그다음 약간 약한 불로 줄여 냄비 뚜껑을 닫는다. 마지막으로 쪽파를 넣고 뜸을 들인다. 부들부들한 식감을 원한다면 약불에 오래 끓여, 박대를 건드려 봤을 때 살이 들리거나 무를 질러 보아 폭 들어가면 완성.

박대 살이 살살 부서지지 않고 잘 떨어지고, 죽순도 부들부들하니 맛이 좋다.


다음엔 박대구이를 해야겠다.

장날이 언제더라...    


그래도 우리 할매가 끓여준 찌개가 맛있었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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