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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애 Dec 05. 2023

내일과 내 일이 아닌 일(3)

언니는 왜 아무것도 안 물어?

    완만한 경사로 천천히 둘러 가는 코스와 급한 경사로 정상을 향해 곧장 이어지는 코스 중에 효진이 고른 코스는 후자였다. 그 선택을 별생각 없이 따랐는데, 어제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은 탓인지 고비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앞서 올라가는 효진을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면서, 툭 불거진 혈관처럼 곳곳에 솟아 있는 나무 밑동에 발이 걸리지 않게 신경 쓰느라 진땀이 났다. 여러 겹 껴입은 옷이 꼭 전생의 업처럼 무겁게만 느껴질 즈음. 먼저 올라간 효진이 힘내라고, 여기까지만 오면 쉴 수 있다고 독려하며 선 채 기다렸다.

    깔딱고개 쉼터엔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토막 낸 나무를 굵은 철사로 엮어 놓은 엉성한 만듦새였다. 하단부에 노출된 채 박혀 있는 대못은 까맣게 녹이 슬어, 파상풍을 절로 연상케 했지만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긴 내게 파상풍은 내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고를 때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기울기를 느끼며 혀뿌리에서부터 뻐근하게 퍼지는 피 맛을 삼켰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꼭 산 정상에서 봐야 하는 건지. 여기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하며 두리번거렸다. 효진은 어딘가 따분해 보이는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풀다가, 가을의 푸릇한 새벽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고는 “그런데 언니는 왜 아무것도 안 물어?” 하고 질문했다.

    “뭘?”

    “무슨 일이냐고. 신혼여행까지 미룰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거잖아. 궁금하지도 않아? 언니는 언니한테만 관심 있지?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건가.”

    갑작스레 쏘아붙이는 듯한 효진의 말에 나는 당황스러움보다 불쾌감이 명치께에 턱 걸렸다. 얼떨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효진은 남편이 운영하는 센터의 트레이너가 회원들을 상대로 성희롱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지역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왔는데, 남편은 자신이 직접 채용한 직원이 그럴 리 없다며 진위를 파악하고자 신혼여행을 미루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뭐든 자기 눈으로 집적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효진은 상황을 한 문장으로 갈무리하곤, 가방 옆구리에 꽂아 두었던 물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나는 차츰 잦아드는 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날 땐 벤치가 더욱 크게 휘청였다. 뒤로 넘어가거나 부러지지 않고 얼마나 버티려나. 다시 앞서는 효진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을 때, 지금의 제부를 처음 마주친 날이 떠올랐다.


    면접용 구두를 빌리러 효진의 자취방을 찾은 날이었다. 여러 켤레의 구두를 늘어놓고 있는데, 문밖에서 도어락버튼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웬 덩치 큰 남자가 좁은 현관으로 불쑥 등장했다. 남자는 나를 발견하곤 과장되게 놀란 얼굴로 “아, 면접…. 효진이 언니시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홍상준이라고 해요.” 빠르게 자기소개를 마치곤 한마디 덧붙였다.

    “사진보다 실물이 나으시네.”

    그는 두고 간 게 있어서 잠시 들른 거라는 말도, 자신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고르라는 말도 했다. 제집인 양 편히 들어와 효진의 침실에 들어가서는 무언가를 주머니에 넣으며 나왔다. 집을 나서면서는 내 발을 빤히 보다가 허리를 굽혀 내가 꺼내 놓은 구두를 들었다 놨다 하더니.

    “언니 분은 이게 잘 어울리겠어요. 발볼이 좁으시네” 말하며 눈여겨보던 구두를 내 앞에 툭 놓고 마저 말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급히 가 봐야 해서.”

    어딘가 모르게 거침없는 행색으로 남자는 효진의 집을 떠났다. 계단을 울리며 쿵쿵 멀어지는 그의 걸음 소리를 가만 들었다. 현관 참에 한동안 남아 있던 그의 매캐한 향수 냄새와 단 몇 분이었을 그 순간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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