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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lein Jan 14. 2018

여행지의 일상이 주는 선물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해야 할까?

어느 해 여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나는 기나긴 연착과 오랜 비행시간으로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환승을 해야 했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한국에서 날아온 십 분의 일 시간만 지나면 목적지인 베를린에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로는 잠시뿐이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을 비웃듯 내가 타야 할 비행기 편명 옆연착을 알리는 글씨가 선명히 표시되어 있었다. 다시 시작된 기다림은 몸을 더욱 지치게 했다. 지저분한 침구와 스멀스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숙소라 해도 침대에 누우면 당장 잠이 들 것 같았다.


베를린 지하철역 플랫폼에 서있는 남자는 중병을 앓는 사람 같았다. 창백한 얼굴  퀭한 눈으로 그는 지하철이 들어올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손은 남자아이 손을, 다른  손은 반쯤 귀가 접힌 커다란 토끼 인형을 안은 여자아이 손을 잡고 있었다. 사실 남자 몸이 유독 야위었다는 것을 빼고는 그들은 평범한 족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유심히 보게 되었던 이유는 자 옆에 있던 배낭 때문이었다. 거인국 사람들이 매야  것처럼 크고 육중한 배낭은 잔뜩 화가 난 한껏 부풀어 오른 복어처럼 무언가로 가득  있었다.  주머니  국자 같은 주방도구들이 꽂혀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배낭 에는  가족 모든 세간살이가 담겨 있는  같았다.


잠시 후. 긴 신호음이 울리고 지하철이 도착하자 남자의 부인은 아이객실로 향했다. 그러나 남자는 객실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남자는 플랫폼과 객실 경계에서 꼼짝도 않는 배낭을 힘겹게 당기고 있었다. 가늘고 하얀 팔뚝에 푸른 핏대가 솟을 만큼 힘을 쓰느라 뒤로 젖혀진 얼굴에는 쭈글쭈글한 주름이 가득했다. 배낭은 이를 악물고 쏟아내는 남자의 안간힘을 비웃듯 아주 조금씩 움직일 뿐이었다. 결국 배낭은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간신히 객실로 옮겨졌다. 지하철 문이 닫히 객실로 들어온 남자는 아내와 아이들을 확인하고는 털썩 배낭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방금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한 사람처럼 가뿐 숨을 몰아 쉬었다. 숨소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묵직하고 힘겨웠다. 버리고 싶었지만 버릴 수 없었던 삶의 고통을 남자는 하얗게 말라 버린 입술사이로 가쁘게 쏟아내고 있었다.


지하철은 다음 역을 향해 달렸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몸 안에 쌓인 피로를 싰어낼 숙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쉴 곳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금 이대로 여행이 끝난다 해도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감당할 수 없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배낭 끄는 남자를 보며, 추상적이고 막연해 얼마나 버거운지 알 수 없었던 삶의 무게를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책, 어느 이야기, 어느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장면은 지쳐 있던 몸과 마음을 깨우며 나의 베를린 여행 중 가장 의미 있는 장면이 되기에 충분했다.


다음날부터 베를린을 여행했다. 검은색과 회색 톤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며 독일인은 보수적이라 할 만큼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나라를 둘로 나누었던 허물어진 장벽을 보았고, 전쟁으로 검게 그을린 오 대성당을 보았다.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채 비통해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았고 우연히 마주한 벼룩시장에서는 이국의 책들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러면서도 는 커다란 배낭을 끌던 남자 모습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들이 베를린 여행 간다고 하면 화려 하진 않지만 그윽한 고전미와 순수미가 있는 곳이라 소개. 하지만 어느 곳에 가면   있을 거라 확신하며 말할  없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기나긴 연착과  시간 이상을 비행기에서 고 난  지친 몸을 끌고 숙소로 가는 길에 보았던 어느 가족의 다란 배낭과 이를 악물던 남자 모습이다.


여행은 낯선 곳에 머무는 것이다. 낯섦은 설렘을 불러온다. 그러나 생소하기에 자유로움을 방해하고 행동의 시야를 좁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지에 도착하면 여행  무수히 반복하여 시뮬레이션했던 장소를 먼저 찾곤 한다. 자신보다 먼저 다녀간 여행자들 사진 속 장면들을 확인하는 이다. 나의 베를린 여행도 그랬다. 그러나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를 읽으며 가야   리스트를 만들고 계획을 세웠지만 리스트에  어느 가족 모습은 준비했던 의 결과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는 힘들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떠나는 그곳에도 사람들 일상이 있다. 지하철에서  남자의 가족 모습도 그곳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멋진 건물, 멋진 장면이 아닌 낯선 여행지 일상에서 의미를 얻었던 것처럼, 군가는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 누군가 에게는 의미 있는 순간으로 다가올  있는 것이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여행 리스트 너머엔 힘들어하고 고민하고 기뻐하며 행복해하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에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여행지라 잠시 계획을 벗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해 본다면 떠나온 나의 삶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며 동질감을 얻 위안 감동을 얻을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며 마주하는 감정들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 선물을 받고 싶다면 준비해야  것이 있다. 그것은 계획에서 벗어날 용기와 의미 있는 장면을 바라볼 순수한  , 그리고 새로운 일상의 장면을 마음에 담을 따뜻한 감성이다. 누군가 경험했던 여행 리스트 보며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어느 곳을 여행하든 잠재되어 있던 의식을 버리고 틀을 벗어나 여행지 일상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깊고 감동적인 여행의 의미를 찾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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