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나를 사랑하기에도 멀었는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초반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들이다.” 유전자는 오래 살아남고, 우리는 그것을 운반하기 위해 잠깐 태어났다 사라지는 숙주에 불과하다는 것. 어딘가 힘 빠지면서도 무시무시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요즘 들어 저 문장에 꽤 수긍이 간다. 한해 한해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와 더욱 닮아가는 나를 너무 많이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나에게서 발견되는 부모의 그늘은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삼각형 체형에 구부정한 뒷모습이 엄마와 점점 비슷해지고, 엄마가 아팠던 어깨와 손목 관절에 나도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찍힌 사진에서 아빠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름이 돋기도 한다. 유전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쯤 되면 못되고 나쁜 유전자가 더 끈질기게 살아남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체형이나 생김새, 성격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닮는 것이 아니다. 책 <거울 명상>의 저자 김상운은 부모의 해결되지 않은 무의식이 자식에게 전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심지어 나조차 모르고 있는 무의식까지 물려주게 된다니 무섭고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를 닮을까 봐서다. 어딜 보자,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세상의 좋은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더 먼저 보곤 한다. 자기 연민이 있는 데다 남 탓도 즐겨하며 끈기와 뒤끝이 부족할 때가 많다. 늘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저울질하고 내가 좀 더 낫다고 생각하면 으스대기도 한다. 여러모로 정말 밥맛이다.
성격이야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부분도 크다고 치자. 다른 무엇보다 닮을까 걱정되는 건 자기 사랑이 부족한 내 모습이다. 자기 사랑의 실현은 인생의 큰 숙제라고 생각한다. 타고났거나, 유년 시절 가정에서 일찍이 숙제를 끝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늦게나마 20대 후반부터 요가, 명상을 통해 배워가고 있지만 아직 “나는 나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온 마음이 우러나는 ‘Yes’가 나오지는 않는다.
6~7세 정도의 기억이다. 엄마가 출근 전 날까지 해야 할 학습지 진도를 표시해 두고 갔는데 내가 꾀를 부리며 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울면서 “엄마처럼 살고 싶어?” 하며 무척 화를 냈다. 엄마는 그때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고 시부모와 한집에 살았다. 주 6일 직장에 가면서도 살림을 했으니 무척 힘들었을 거고, 그날은 특히나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었겠지 싶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때 엄마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사랑이 부족한 내 모습을 엄마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다. 엄마는 평생 나를 희생해서 키웠다. 맘 편히 살림만 할 수도, 일에만 몰두할 수도 없었던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줄 사랑을 내게 전부 주었던 것 같다. 그치만 나는 우리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나에게 먼저, 그러고 나서 자식에게도 나눌 수 있는 큰 사랑이 있을 때야말로 비로소 자식을 낳을 준비가 된 것이 아닐까.
자기 사랑의 여정을 나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주해야 할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상처, 보듬어줘야 할 그림자가 아직 한참 남은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최적의 가임 연령은 벌써 지나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민과 준비 끝에 아이를 낳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