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남편과 감성적인 아내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할 때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해달라고 종종 농담을 던진다. 어떤 이는 로봇 같다며 내 말투를 흉내도 낸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 하지만 그만큼 표현이 되지 않는가 보다. 과거를 한 장 두 장 넘겨 보면 어릴 적 감정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드문드문 난다. 왜 그랬을까. 왜 내 감정을 들키기 싫어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던 것 같다. 뭔가 엄청 즐거운 상황에서도 '이 정도의 즐거움은 일상이지.'라던가, 괴로운 상황에서는 '이 정도의 고통은 가소롭지.'라고 다른 사람들이 내 모습을 봐 줄기 바랬던 중2병의 감수성이랄까. 약한 부분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약한 자존심 때문에 감정 표현을 자제했고 지금까지도 그 가면을 벗지 못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최근 '금쪽같은 내 새끼'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내가 감정 표현에 대해 미숙했던 시절을 보냈다고 느꼈다. 특히 누군가가 칭찬을 하면 그 반응에 감사의 표현보다는 아니라며 부끄럽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지금도 상대방의 칭찬은 항상 기분이 좋지만 어색한 반응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화가 날 때에도 그 자리에서 표현을 못하고 뒤에서 '내가 아까 이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며 억울해했었다. 이 부분은 회사에 가면서 꽤 직설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내 감정을 숨기는 훈련이 되어 일상생활에서는 감정 노출을 최소화한다.
나의 아내는 희로애락이 뚜렷한 사람이다. 100m 앞에서도 감정이 드러난다. 기쁠 때는 100일 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뱅글뱅글 돌며 기뻐하고, 화날 땐 100년 만에 만난 원수처럼 창을 쥐고 돌격한다. 슬플 땐 100cm도 되지 않는 상장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사람이 되었다가, 즐거울 땐 주변의 1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회전목마고 아내는 롤러코스터다. 나는 인생의 큰 짜릿함은 없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있고 반복되는 삶이 크게 지루하지 않다. 작은 것에서도 만족을 느끼고 감사해한다. 하지만 롤러코스터의 입장에서는 나는 지루하고 신나지 않을 것이고 느리고 진취적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진폭이 다른 두 사람이기에 속도도 정도도 맞추기가 힘들다.
드라마 하나를 보더라도 거기에 쏟는 감정의 양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아내는 드라마를 볼 때 거의 실제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고 느낀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각본상 주인공이 뻔히 화면에서 보이는 단서를 찾지 못할 때 가슴을 치며 답답해한다. 악역에는 수많은 저주를 퍼붓고 잘 생긴 주인공에게는 꽃 길만 펼쳐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나도 슬픈 장면을 볼 땐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발견하곤 하지만 보통 드라마 디테일에 신경은 썼는지,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프레임을 씌우고 보기 때문에 감정을 쏟는 아내를 보며 "드라마잖아."하고 마른오징어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회전목마도, 롤러코스터도 결국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 우리 부부도 아직 맞춰가는 과정에 있는데 서로 다른 성향의 장점만 상대방에게서 배우면 좋을 것 같다. 아내는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준다.(둘이서 싸울 때 빼고) 그리고 나의 유니버스에서 악역이 맡은 사람을 같이 미워해줄 수 있는 공감력은 잘 배워야 할 것 같다. 아내가 나에게 배워야 할 부분은 감정에 쏟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부분이다. 감정의 진폭이 큰 만큼 감정선의 길이가 긴데 그만큼 에너지가 더 많이 소모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불필요한 부분에서 감정 소모를 줄였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가 청첩장에 썼던 글처럼 서로 다름을 잘 받아 드리고 하나의 사랑으로 물들어 갈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바다 같은 사람과 노을을 품은 사람이
서로 사랑을 하여 조금씩 물들어가듯,
그렇게 라벤더 한송이를 피워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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