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마음이 필요해
”커피 한잔 하실래요? “
(경직된 표정으로) ”아니, 조금 후에 보고 할 게 있어서요. 다녀오세요. “
거북이 목을 빼고 탁탁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그렇게 홀로 앉아 일을 끝내고 나면 공허함이 밀려온다.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가. 무얼 위해 기계가 되어 가는가.
슈퍼맘, 슈퍼우먼, 일과 육아를 둘 다 잘하는 엄마.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런 단어들은 현실에는 존재하기 상당히 어렵다. 나를 바꾸고 성장시켜서 저런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여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둘째를 낳고 육아휴직을 끝낸 후 복직을 했을 때, 처음 1년간은 내가 육아와 일을 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라? 이게 가능한 일이었네? 하며 나도 일육아 다 잘하는 슈퍼맘이 된 건가? 하며 으쓱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두 번째 복직 후 첫 세 달간은 회사일에 매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3월 즈음에 복직을 해서 나도 적응해야 하고 아이들도 새로운 어린이집에 적응해야 했던 시기였다. 친정엄마 찬스, 이모님 찬스를 이용해 육아는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줄 알았으나 그건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준 덕분이었다.
일단 회사에서는 정확히 5:00시가 되면 칼 같이 퇴근을 해서 이모님 교대시간과 맞추기 위해 노력을 했다. 유연근무제여서 정상 출근은 8:30이지만 남들보다 빨리 8시 출근하여 5시에 퇴근하였다. 이 시기엔 회사에 참 고마웠다. 워킹맘에게 잘 맞는 회사라고 생각까지도 했었다. 회사에서는 정말 초집중을 하여 시간 내에 모든 일을 정해놓고 끝내려고 노력했고, 시계를 항상 보며 5:00 시가 찍히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가 차로 향했다. 밀릴 때를 감안해서 30분의 여유를 두고 출발하여 이모님 퇴근시간에 맞추기 위해 액셀을 밟고 또 밟았다.
그리하여 코털을 휘날리며 문 앞에 제시간에 딱 도착하여 아이들을 맞이했을 때의 희열이란.
그런데 단점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깝게 딱딱 떨어질 때의 희열은 있었지만 어딘가 많이 공허했다. 집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비비며 지냈지만 이번엔 아이들 잠자는 시간에 집착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10시에는 꼭 재워야지 내가 다음날 출근 할 수 있고, 아이들도 수면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강제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이 되면 무조건 맞추려 하다 보니 아이들이 놀다가도 딱 끊고 들어가야 했고, 우리 부부가 가끔 야식을 먹다가도 그 시간이면 티비를 끄거나 했다.
융통성 없는 규칙은 융통성 없는 나와 만나 마음의 공간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소리를 자주 지르게 되었고 그동안 쭉 유지했던 잠자리 독서 시간도 제한적으로 1권만 읽고 자거나 하게 되었다. 워킹맘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이런저런 규율이 생기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좋은 습관들이 사라지는 건 참으로 아쉬웠다.
로봇처럼 딱딱 떨어지는 생활을 하며 매일을 달리는 동안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동료들과 마음의 여유를 나눌 티타임 가지기도 어려웠고, 얼른 집에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래도 외골수 기질이 있는데 이 시절은 더더욱 나만의 시계에서 살았던 거 같다.
‘나도 기계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마음속에선 이런 외침이 있었지만 반대로 이런 소리도 들렸다.
‘이런 환경에서 버티려면 감정은 배제하고 기계처럼 살아야 해. 그래야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있는 거야.‘
이렇게 메마른 채로 근 2년 정도를 살다가 옆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은 원래 팀보다 더 바쁜 팀이었는데 신기한 문화가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 10시 정도가 되면 다 같이 차를 마시러 간다. 처음에는 이전 팀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혼자서 바쁜 척을 다 했다. 가자고 해도 바쁘다며 빠진 적도 있고 그렇게 해서 집에 시간 맞춰 가는 걸 당연시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고 실컷 수다를 떨며 여유를 부린 그 30분 정도의 시간이 그다음 일을 할 때 활력이 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계 워킹맘이 아닌 감정 있는 사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여유’가 주는 에너지를 알게 된 거다. 여유는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의 여유를 챙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나만의 여유를 챙기는 습관을 들인다. 진짜 시간이 없다고 생각되더라도 복도를 한 바퀴 돌고 오거나 일부러 화장실에라도 다녀온다. 그러면 주의가 환기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나 일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난다.
일에서 여유를 찾았으니 육아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육아는 이모님과 이야기를 하여 시간을 융통성 있게 조정했다. 그 시간에 딱 맞춰 가지 못하면 다른 날 좀 일찍 가기도 하면서 총시간을 맞추었고 오버될 경우에는 시급제로 추가하여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휴가를 쓰거나 하면 그날은 이모님을 쉬게 해 드리고 다음번 급할 때 사용할 수도 있는 여유일로 남겨 두었다.
가끔 생각보다 일찍 집에 도착한 날에는 차 안에서 5분이라도 나만의 여유를 부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잠자리 독서 역시도 시간이 많은 날에는 조금 더 많이 읽고 시간이 부족한 날에는 최소1권으로 정해놓고 읽어주었다. 그리고 아이와 대화를 더 많이 하고 스킨쉽을 많이 해주려 노력했다. 모든 것에 완벽하려는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나니 나와 아이가 모두 행복할 수 있었다.
일과 육아를 다 하는 워킹맘들에게는 ‘빈 틈’이 정말 중요하다. 바쁜 와중에도 어떻게든 짬을 내어 마음에도 숨을 쉴 수 있게 해 줘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니까. Flexibility!
“모든 상황에서 동시에 좋은 엄마, 좋은 아내, 훌륭한 커리어 우먼이 되는 건 불가능해요.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이럴 땐 최고의 엄마로, 저럴 땐 최고의 아내로, 커리어우먼으로 자신의 위치를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거죠. 그러면 평균적으로 봤을 때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 김아연, ‘엄마로만 살지 않겠습니다’ 중 인용된 김용아씨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