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원 Apr 03. 2019

말과 행동만 있으면 아무도 안 읽어요

서술과 묘사

사건의 뼈대는 행동과 말(대화)이 결정한다. 사건을 중심으로 글을 쓰고자 한다면, 행동과 말에 집중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사실과 사건에 관한 서술(敍述)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서술은 행동이나 말을 직접 기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견해도 아니다. 사실을 기록할 때,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면 모두 서술이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 ‘그가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왕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등의 문장은 인물의 성격이나 어떤 행동의 동기/원인, 심경의 변화와 독자들은 아직 모르는 사실과 사건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세 살 많은 남편 정대현 씨, 정지원 양과 서울 변두리의 한 대단지 아파트 24평형에 전세로 거주한다.


조남주의『82년생 김지영』의 첫 세 문장이다. 소설이라는 걸 모르고 읽으면 신문이나 주간지 특집 기사에 나오는 인물 소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주인공 김지영 씨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남편 정대현 씨나, 3살 되었다는 딸도 그렇다. 모든 이야기는 완전히 가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진짜냐 가짜냐가 아니라 사실을 기록한 방식이다. 윗글은 서술로만 전개된다. 첫 문장은 김지영 씨의 나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나머지 문장도 김지영 씨의 결혼 여부와 가족 관계, 거주지를 서술한다. 이러한 설명은 단지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김지영 씨와 그의 가족이 매우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추론하게 해 준다. 


글쓰기에 미숙한 사람들은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서술로 글을 시작할 때가 많다. 행동이나 말이 부족하면 다루고자 하는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기 어렵고, 장황하지만 모호한 글이 되기 쉽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행동과 대화가 변변치 않을 때 지루한 서술에 의존하게 된다. 서술은 얼마든지 더할 수 있으므로, 서술을 하다 보면 뭔가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쓸 데 없는 문장도 많아진다. 글쓰기에 미숙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므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술로 전달하는 정보는 사실이어야 하고, 독자에게 꼭 알려줄 필요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새벽 2시 47분.
 딸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새벽을 깨운다. 그렇잖아도 토막잠을 자던 나는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윗몸을 돌려 침대 옆 시계를 힐끗 쳐다본다. 행여 딸이 울음을 그치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살며시 감고 잠자코 누워 기다려 본다. 하지만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다. 의식의 엔진인 심장이 쿵쾅거리며 온몸의 세포를 깨운다.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윽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엄마.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딛는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디딘 후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딸의 방으로 간다. 창밖으로는 부엉이 눈처럼 둥근달이 보인다.


스테퍼니 스탈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의 일부다. 이 글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다. 역시 모르고 읽으면 구분이 어렵다. 윗글은 새벽에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 깨어, 딸이 자는 방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윗글은 행동, 대화와 함께 서술이 사용되고 있는데, 굵은 글씨로 표현한 문장이 이에 해당한다. 이 문장들을 빼고, 행동과 말만 남기면 다음과 같다. 


새벽 2시 47분. 토막잠을 자던 나는 졸린 눈을 억지로 비벼 뜨고 윗몸을 돌려 침대 옆 시계를 힐끗 쳐다본다. 행여 딸이 울음을 그치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살며시 감고 잠자코 누워 기다려 본다. 

엄마, 엄마’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딘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닫은 후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딸의 방으로 간다.


이렇게 줄여 써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데, 저자가 굳이 나머지 문장을 덧붙인 이유는 행동과 대화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무엇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문장들을 비교해보자.


(ㄱ) 새벽에 딸이 울었다.

(ㄴ) 새벽에 (나는) 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ㄷ) 새벽에 딸의 울음소리가 (나에게) 들렸다.

(ㄹ) 딸의 울음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ㄱ)의 주어는 ‘딸’이며, 이 문장은 딸의 행동을 직접 드러낸다. 반면, (ㄴ)에서 주어가 ‘나’로 바뀌었으므로, 이 문장은 ‘나’의 경험을 강조한다. 이와 달리, (ㄷ)은 울음소리가 주어이며, 이 문장은 내가 듣고 싶어서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경험의 수동성을 드러낸다. (ㄴ), (ㄷ)과 달리 (ㄹ)에는 ‘나’가 사라지고, ‘새벽’이 목적어로 사용되었는데, 그 결과 딸의 울음소리는 ‘나’가 아니라 새벽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조응한다. 이처럼 네 문장은 얼핏 보기에는 다 같은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ㄱ)-(ㄷ)은 객관적 사실만 전달하는 반면, (ㄹ)은 고요한 새벽의 ‘적막’과 딸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대비하면서 청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미지는 “창밖으로는 부엉이 눈처럼 둥근달이 보인다”는 마지막 문장과도 잘 어울린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효과를 의도했기 때문에, (ㄱ)-(ㄷ)이 아니라 (ㄹ)처럼 썼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작가가 정말 그런 의도로 글을 썼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게 아니냐는 질문일 텐데, 당연히 나는 작가가 어떤 의도로 문장을 썼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간혹, 문학 평론이나 비평에 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왜 이 문장이 아니라 저 문장인가?’ 혹은 ‘왜 이 문장이 여기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만 강조하겠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은 자기 글을 쓸 때도 똑같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미숙한 사람들은 글에 휘둘린다. 즉,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쓴다. 자신이 쓰는 문장이 왜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지를 따질 때, 우리는 글쓰기 과정 전반을 통제할 수 있다. 


위 예문에서 볼 수 있듯, 서술은 행동이나 말과 함께 사용될 때, 그 힘을 발휘한다. 사건의 뼈대를 행동과 말로 제시하고, 나머지 정보는 서술로 채우는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