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원 Apr 10. 2019

거짓을 지어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재현과 왜곡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맞는 말이다. 꾸준히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사실을 전달하는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기자가 될 수 있다면, 모든 시민은 ‘기레기(기자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기자라면 마땅히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객관성을 잃고, 당파성이나 주관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거나 악의적인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을 욕하기는 쉽지만, 그 기준을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욕해 본 독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얼마나 정직한 글을 써 왔는가.


나는 해마다 8, 9월이면 예비 기레기들을 만난다. 그즈음, 수험생들이 자기소개서를 봐달라고 가져오기 때문이다.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찬 글을 읽는 것은 너무나 끔찍한 경험이라 가능하면 피하고 싶지만,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라서 안 봐줄 수도 없다.


경영학과에 지원했던 한 학생은 무슨 활동을 기록하든 항상 ‘이 활동을 통해 경영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라는 식으로 마무리하는 글을 써왔다. 자기 딴에는 티 안 나게 쓰려고 노력했겠지만, 이 짓만 수년을 해온 내 눈에는 죄다 역겨운 허위다.


나는 정말 이렇게 생각했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돌아오는 답변은 ‘아니요’다. 나는 다시 묻는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냐. 이런 거짓말을 대학에서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런 거짓말로 대학에만 들어가면 그만인 거냐’ 돌아오는 답은 ‘다들 그렇게 쓰는데요. 그리고 그럼 뭘 써요?’


나는 자기소개서 지도를 부탁하는 학생들에게 딱 한 가지만 요구한다. ‘정직하게 쓰세요.’ 문장이나 구성이 어색한 것은 고칠 수 있지만, 거짓을 사실로 만들 수는 없다. 학생들은 자신이 실제로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배우지도 않은 것을 생각했다고, 느꼈다고, 배웠다고 쓴다. 단 한 번의 ‘진짜?’라는 질문에도 버티지 못할 얄팍한 내용으로 자기 인생을 왜곡, 조작하고, 그걸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길 바란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 진학에 성공한다면, 앞으로도 ‘남들도 다 하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변명하며, 허위와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글을 쓰면서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번듯한 언론사에 취직해서 진짜 기레기 노릇을 할지도 모른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태도가 우리를 피노키오로 만든다. 우리가 부패한 권력자들이 쓴 자서전을 보면서 구토를 느끼는 이유는 ‘자서전’이라는 자기 고백적 형식을 빌려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그 비인간적인 뻔뻔함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수업 시간에 미리 못 박아 둔다. “나는 이 뻔뻔한 사기극에 동참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쓴 글이 아니라면, 나에게 자기소개서 첨삭을 부탁해도 기분만 상할 겁니다.” 사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욕하는 기레기 같은 짓은 하면 안 된다. 이쯤에서 나도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중학교 3학년 개학식 때 일이다. 개학하는 날부터 두발 검사를 할 리는 없었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방학 동안 기른 머리에 헤어무스를 바르고, 당시 유행하던 가운데 가르마를 냈다. 3학년이 되었으니, 학생 주임의 눈만 피해서 숨어 다니면 일주일 정도는 별일 없으려니 했다. 


우리는 운동장에 군인들처럼 도열했고, 나는 담임의 눈을 피해 맨 뒷줄에 섰다. 담임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한 게 문제였다. 교장의 훈화가 한창일 무렵, 누군가 내 머리칼을 확 잡아챘다. 키가 2m에 달했던 체육 선생은 내 귀밑머리를 잡고 운동장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그는 운동장 뒤편 철조망 근처로 나를 끌고 가서, 내 뺨을 장난스럽게 툭툭 쳤다. 


요것 봐라, 요거. 완전 기합이 빠졌구먼”


그는 주머니에서 ‘불도저’를 꺼냈다. 나는 벌겋게 된 얼굴로 내일까지 꼭 이발하겠다고 약속했다. 다행히, 머리칼은 보존할 수 있었지만, 굴욕적인 ‘얼차려’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만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내 옆으로 불량한 동료들이 늘어났다. 개학식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던 다른 친구들은 OTL 자세를 취하고 있던 우리를 힐끗거리며, 수군대고, 킥킥거렸다. 무지 후덥지근한 봄날, 나의 소심했던 저항은 그토록 쉽게 진압되었다. 


그 애도 보고 있었을까?


10년 전에 어느 주간지에 연재했던 글 중에서 일부를 손봤다. 처음 썼던 글은 더 길고, 산만했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문제는 과장(誇張)이었다. 즉,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쓰지 않았다. 처음 쓴 글에는 “짝사랑하던 여학생에게 잘 보이려고 머리 손질을 했다”라고 썼다. 어떤 여학생에게 호감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걸 ‘짝사랑’이라고 쓰는 건 아니다 싶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으로 고쳤다. 


내가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처음 글을 쓸 때, 내가 체육 교사에게 뭐라고 변명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불쌍한 내 처지를 강조하려고, ‘울먹이며’,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썼다. 내가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울먹이며 애원할 정도로 비굴한 놈은 아니었다. 윗글에서는 ‘내일까지 꼭 이발하겠다고 약속했다’로 고쳤다. 


이렇게 고쳐도 별 티도 나지 않는 것 같은데, 유난을 떨 필요가 있을까? 글의 재미를 위해서 그 정도는 지어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독자는 내가 쓴 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분도 못 할 텐데 적당히 지어 쓰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은가? 수필을 쓸 때, 허구를 어느 정도 허용할 것인가는 여전히 논란이 되는 문제다. 그러나 진실을 기대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짓을 지어내는 짓은 뻔뻔하고 비윤리적이다.(... )





안녕하세요. 심원입니다. 


17화를 끝으로, 『신이 내린 필력은 없지만, 잘 쓰고 싶습니다』의 연재를 종료합니다.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격려해주신 많은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책 전체 분량의 20% 정도는 브런치를 통해 소개한 것 같습니다. 내용을 중간중간 발췌하다 보니 맥락이 끊기고, 매끄럽지 않아 속상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개괄해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에필로그에도 썼지만, 다음 책에서는 글 고치기 기술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연작 느낌이 나도록 제목을 『어떻게든 쓰긴 했지만, 잘 고치고 싶습니다』로 정해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을 위해서, 브런치에 계속 읽을만한 초고를 올리겠습니다. 다음 책도 무사히 출간할 수 있도록 계속 관심 가져주세요. 참고로 마이크임팩트에서 4월 18일 무료 강연이 있으니 시간 나시는 분은 강연에서 뵙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늘 행복하시길 빕니다.


2019. 봄. 대치동에서 

심원 드림


이전 16화 말과 행동만 있으면 아무도 안 읽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