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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Mar 27. 2019

말과 행동이 없으면 아무도 안 읽어요

말과 행동

얼마 전, 딸이 일기를 썼다며 보여 준 적이 있다. 일기는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에서 시작해서, ‘아빠와 카드 게임을 했다’로 끝났는데,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밌었다’, ‘슬펐다’, ‘화가 났다’등 감정을 기록하고, 좀 더 자라면, 꽤 그럴듯한 견해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글쓰기가 어렵다면, 성급하게 견해를 쓰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경험한 사실과 사건을 담담하게 기록하는 글을 써보자.


우리는 어떤 사실(사건)을 알게 되거나, 직접 어떤 사건을 경험한 후,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는 누군가의 행동이나 말을 보거나 들었을 때, 거기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인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는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동과 말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서 쓰기도 한다. 


( 이런 일이 있었다 ) 출근 전, 주차장 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다. 어떤 남자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주차장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차장 안쪽으로 물러섰다. 아이가 제 아빠를 보더니 “아빠, 엄마가 담배 피우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아이 아빠는 “엄마가 그랬어?”라고 대꾸하면서 내 앞을 지나갔다.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한동안 멍하게, 사라져 가는 부자(父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나는 급하게 휴대폰에 초고를 썼는데, “담배 피우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했어”라는 아이의 말 때문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아이의 말에 자극을 받았고, 뭔가 쓸거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일단 써야 한다. 행동과 말은 휘발성이 강해서 직접 경험한 사건이라도 재빨리 기록하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하기 어렵고, 기록하더라도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건을 기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건이 일어난 그 순간 기록하는 것이다. 


우선, 윗글은 보고 들은 사실만 시간순으로 기록했다. 모든 문장 사이에는 ‘그래서?(어떻게 됐는데)’라는 질문이 숨어있으며, 모든 문장은 행동 아니면 말만 기록했다. 초고에는 견해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일부러 뺐다. 사건을 기록할 때는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는 게 좋은데, 성급하게 견해를 쓰기 시작하면, 글이 산으로 갈 때가 많다. 사건만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다면, 견해는 언제든 덧붙일 수 있다.


예문에 기록된 사건은 길어봤자 3분 안에 일어난 일어났다. 그러나, 윗글을 읽는 데는 20초도 걸리지 않는다. 문장은 시공간을 압축한다. 이것이 마법의 핵심이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기록할 방법은 없다. 사실을 기록하는 글은 경험을 재구성하고 압축해야 한다. 윗글에는 쓰지 않았지만, 아이가 타고 있던 유모차는 보라색이었고, 아이 아빠는 군청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 누가 알고 싶어 하겠는가?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다. 그러나 아이와 아빠의 대화를 기억할 수 없다면, 윗글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세부 정보를 기억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차라리 최소한의 행동과 대화만 기록한 짧은 글이 낫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 닫혀 있던 주차장 문을 열고 던힐 담배를 피웠다. 나는 항상 출근 전에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다. 그때, 군청색 반바지를 입은 남자가 보라색 유모차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태우고 주차장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혹시라도 담배 연기가 그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주차장 안쪽으로 물러섰다. 유모차에 타고 있던 아이가 제 아빠를 보더니 “아빠, 엄마가 담배 피우면 나쁜 사람이 된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아이 아빠는 “엄마가 그랬어?”라고 대꾸하면서 유모차를 끌고 내 앞을 지나갔다. 졸지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에 쓴 글을 일부러 늘려 써보았다. 새롭게 추가한 내용은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출근은 당연히 회사로 하는 것일 테니 ‘회사에’라는 표현은 빼도 된다. 열려있는 주차장 문을 열었을 리는 없으므로 ‘닫혀 있던’도 삭제. 내가 피우는 담배가 던힐이든 디스든 말보로든 상관없으므로 ‘던힐’도 뺀다. 독자들이 내가 왜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 정말로 궁금할 것 같지 않으니 담배 피우는 습관 운운한 부분도 삭제. 남자가 입은 반바지와 유모차 색이 뭐든 상관없으니 ‘군청색 반바지를 입은’도 뺀다. 유모차에 타고 있고, 말을 할 수 있으면 네댓 살 정도일 텐데, 정확하지 않으므로,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도 뺀다. 내가 주차장 안쪽으로 물러선 것이 담배 연기 때문이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을 테니 ‘혹시라도 담배 연기가 그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도 삭제. 아이가 갑자기 유모차에 벌떡 일어나거나, 유모차에 내려서 아빠에게 말을 했을 리 없으므로 ‘유모차에 타고 있던’도 뺀다. 아빠가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지, 메고 가지는 않을 것이므로 ‘유모차를 끌고’도 뺀다. 이렇게 꼭 필요 없는 내용을 빼면 글자 수가 줄어든다. 뭔가 아쉽겠지만 쓸데없는 내용으로 독자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보다는 혼자 아쉬운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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