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품은 섬, 여덟 번째
왕은 뱀의 부족이다. 이 나라엔 원래 왕이 따로 없었다. 여섯 부족이 있는데, 이들 각각의 수장을 간이라고 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볕이 좋은 날을 골라 여섯 간이 거북이 바위에 올랐다. 이 가운데 한 명을 추대해서 나라 일을 정하게 했다.
주로 말과 소의 부족에서 뽑히는 때가 많았고, 간혹 개나 고양이의 부족에게서도 뽑혔다. 이들 부족을 각각 마가, 우가, 구가, 묘가라고 했다. 돼지의 부족도 있었는데, 이들은 돈가라고 불렸다.
제일 약한 게 뱀의 부족, 사가였다. 원래 이 나라는 마가, 우가, 구가, 묘가, 돈가의 다섯 부족이 대대로 터 잡고 살던 땅이었다. 나중에서야 이 땅에 흘러들어온 부족이 뱀의 부족, 사가였다. 나머지 다섯 부족, 특히 힘이 센 마가와 우가는 이들을 가리켜 근본이 떳떳지 못하다며 따돌리곤 했다. 그래서 사가의 간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어느 해인가, 뱀의 부족은 따돌린 채 나머지 다섯 부족의 간만 거북이 바위에 모인 적이 있다. 거북이 바위에 모여 내년 농사에 필요한 씨앗을 나눈다. 여기에 끼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사가의 간이 나머지 다섯 부족의 간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술과 고기를 바치고, 사가의 장정들이 다섯 부족의 농사일을 힘껏 돕고 나서야 사가의 간은 다시 거북이 바위에 오를 수 있었고 간신히 씨앗을 얻었다.
그해, 뱀의 부족은 사람 수가 반 토막 났다. 장정들이 모두 다른 부족의 농사일에 동원돼 정작 부족의 농사는 망쳤기 때문이다. 그나마 곳간에 쟁여놨던 식량과 가축 역시 다섯 부족의 간에게 바치고 나니 남는 게 없었다. 여인들에게서 젖이 나오지 않아 비실비실 마른 아이들이 눈을 퀭하니 뜬 채 죽어갔다. 밤에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는 노인이 흔했고, 장정들 역시 지팡이를 잡고서야 제대로 설 수 있었다.
왕이 없던 나라에 왕이 생긴 건 백제 때문이다. 백제의 기마 군단이 이 나라를 쓸고 갔을 때, 사가의 간은 아들 일곱 가운데 다섯을 잃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늘 선봉에 서는 건 뱀의 부족, 사가의 장정들이었다. 가장 힘이 센 말의 부족, 마가의 간은 전쟁이 터지자마자 큰 아들을 왜인들의 땅으로 보냈다. 소의 부족, 우가의 간은 구원병을 청한다는 핑계로 아들들을 죄다 나라 밖으로 보냈는데, 전쟁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다른 부족 역시 비슷했다.
전쟁이 끝나고 여섯 부족의 간이 거북이 바위에 올랐을 때, 사가의 간은 다섯 개의 해골을 꺼내고는 통곡했다. 다섯 간은 눈을 내리깔았고, 그때부터 사가의 간이 하는 말에 쉽게 토를 달지 못했다. 뱀의 부족, 사가의 간은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차근차근 실리를 챙겼다.
이 나라엔 쇠가 흔하고, 쇠를 잘 다루는 자가 많았다. 특히 말의 부족, 마가의 사람들이 쇠를 잘 다뤘다. 마가의 대장장이들이 두드려 만든 쇠붙이는 유난히 날카롭고, 견고했다. 바다 건너 온 왜인들은 마가의 쇠붙이라면 일단 값을 두 배로 쳐줬다. 마가의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만들어내면, 나머지 다섯 부족의 간이 차례로 좋은 것을 골라 갖는 게 이 나라의 풍습이었다.
사가의 간은 원래 가장 나중 순서였는데, 다섯 아들을 잃은 뒤로는 차례가 앞당겨졌다. 백제와 싸우다 죽은 아들의 무덤에 바치려면, 가장 좋은 쇠붙이를 골라야 한다는 게 이유였고, 나머지 다섯 간은 반대하지 못했다.
가장 좋은 쇠붙이를 고르게 된 기회를, 사가의 간은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걸 왜인 부족 수장들에게 선물했다.
마가의 쇠붙이 가운데서도 최고라는데 그걸 주겠다니, 왜인 부족 수장들은 기뻐서 몸을 떨었다. 대신 거래를 했다. 왜인들이 사가와 거래하는 물품에 대해 종전보다 값을 두 배씩 쳐주기로 했다. 왜인들이 사는 땅은 동쪽과 북쪽으로 끝없이 넓었다. 사람도 넘쳐 났다. 하지만 그곳에 쇠붙이는 없었다.
좋은 쇠붙이를 갖고 있는 수장 아래로 사람이 몰려들었다. 왜인 수장 입장에선 최고의 쇠붙이를 얻을 수만 있다면, 사가와 거래하며 조금 값을 더 쳐줘도 손해가 아니었다. 수장 입장에선 더 많은 사람을 거느리는 게 결국 이익이다.
뱀의 부족, 사가 역시 이런 거래로 금세 살림이 넉넉해졌다. 왜인 부족 수장들과의 친분이 두터워졌으므로, 일손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 뱀의 부족에게 사람이 많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왜인 수장들이 사람을 보내줬다. 여섯 부족 가운데 가장 가난하던 뱀의 부족, 사가. 그들은 불과 몇 해 만에 이 나라에서 가장 넉넉한 재물과 사람을 부리는 부족이 됐다.
또 하나의 기회는 백제로부터 왔다. 전쟁에서 이긴 백제는 해마다 가을이면 사신을 보냈다. 당연히 오만했고, 요구하는 게 많았다.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부족의 간들은 내켜하지 않았다. 뱀의 부족, 사가의 간이 사신 접대를 자원했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다섯 아들을 잃었던 그가 백제 사신에게 술과 고기를 바치겠다고 하자, 나머지 다섯 부족의 간은 의아해했다. 그들은 그저 진저리 쳐지는 백제 사신을 만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백제 사신을 접대하게 된 사가의 간은 늘 사신이 요구하는 것보다 넘치게 베풀었다.
사가의 간은 결국 이 나라의 첫 번째 왕이 됐고 스무 해 가까이 다스렸다. 왜인 부족 수장들과 직접 무역을 터서 곳간을 그득 채우고, 백제를 후견으로 삼았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왜인들을 넉넉히 부릴 수 있는 그를 막을 자는 이 나라 안에 없었다.
백제 군사에게 다섯 아들을 잃었던 사가의 간이 백제 사신의 비위를 맞추느라 곳간을 털었던 이유를, 다섯 부족의 간은 뒤늦게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백제의 뜻을 거스르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왕이 된 사가의 간, 그가 기불의 화살에 죽었다.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