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설가 지망생 Jan 27. 2016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알을 품은 섬, 다섯 번째

소설 '알을 품은 섬' 이전 편 보기


왕은 다스리는 땅이 좁았다. 그보다 큰 나라가, 가야 땅에서만 다섯이었다. 땅이 좁은 게 왕의 잘못은 아니다. 이 나라는 원래부터 작았다. 왕은 그게 늘 불만스러웠다.


왕은 머리가 납작하고 코가 높았다. 태어나자마자 이마를 돌로 눌러뒀다는 표시였다. 궁궐을 드나드는 이들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이마가 불룩한, 알에서 난 자들은 궁궐에 들어올 수 없었다. 어쩌다 이마가 불룩한 이들을 마주칠 일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개 외국에서 온 장사꾼이나 사신이었다. 주로 바다 건너 온 왜인들이 많았고, 동쪽 계림에서 온 자들도 종종 있었다.


“네 생김새가 몹시 기이하구나. 꼭 알에서 태어난 자처럼 이마가 불룩한데, 얼굴에 자국이 없구나. 그런데 머리는 또 박박 깎았다. 그걸 보니 너는 사람 뱃속에서 난 자들과 꼭 같지도 않구나.”


왕 앞에 선 사내는 기불. 그가 말했다.


“왜인들 틈에서 자랐으나, 제 부모는 왜인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고, 얼굴에 흉터가 없으니 알에서 태어난 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 근본에 대해선 저 역시 알지 못합니다.”


주름 진 얼굴을 비비며, 왕이 말했다.


“알에서 태어난 자가 아님은 분명해 보이니, 네 근본을 더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다만 네 활 솜씨가 장하다고 들었다. 어디서 배웠느냐.”     


“근본을 알 수 없는 노인에게 배웠습니다. 흔히 부여노인이라 불렸는데, 실제로 어디서 나고 자랐는지를 따지고 들면, 조금씩 말이 달라집니다. 제가 머리를 박박 깎고 다니는 건 스승을 본 딴 것입니다.”     


왕은 글 읽기를 싫어했다. 아니, 글로 쓰여 있는 걸 믿지 않았고, 종일 글 읽기에 파묻혀 있는 이들을 깔봤다. 대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다. 사람이 입으로 하는 말과 마음으로 내는 소리를 구별하는 재주가 있었고, 그게 자랑거리였다. 자기가 자세히 아는 이야기가 나오면, 일단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말하는 이가 얼마나 아는지, 제대로 아는지를 제 나름의 기준으로 따져보는 게다. 그래서 신하들이 힘들었다. 왕 앞에서 입을 다물면, 속내를 감춘다는 의심을 받을 듯했고, 말이 많으면 실속 없이 나대는 것처럼 비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불은 왕의 버릇을 몰랐다. 왕이 말했다.     


“멀리 북쪽 땅에 부여라는 나라가 있다. 해모수가 세운 나라라고 한다. 


하지만 그 후손이 세운 나라가 이젠 더 강성하여, 해모수의 나라를 멸하다시피 했다고 들었다. 


후손 된 자로서 조상의 나라를 겁박하고도 당당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해모수의 후손이며 부여의 적통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세운 나라가 이미 여럿인데, 백제도  그중 하나다. 


혹시 네게 활쏘기를 가르친 자가 부여 노인이라 불린다는데, 그렇다면 그 역시 백제의 핏줄 아닌 게냐?”     


왕 앞에 선 신하들이 일제히 움찔했다. 늙은 신하들은 기억한다.  


오래전 언젠가 백제 기마 군단이 가야 땅을 휩쓸었다. 


말에 올라탄 백제 장군은 온몸을 쇠로 두른 가야 전사들에게 화살을 날렸는데, 백발백중 눈동자에 꽂혔다. 


실제로 화살이 눈동자에 꽂혀 죽은 전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숱한 가야 전사들이 눈을 내리깐 채 제자리에 얼어붙어 섰다. 


결국 그들은 백제 기마대의 말발굽에 치이고 창과 칼에 맞아 죽었다.


창피한 기억이라 노인들은 젊은이들에게 전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정신이 아직 멀쩡한 노인 치고 당시의 참상을 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입에 올리지 않을 뿐.     


소설 '알을 품은 섬' 다음 편 보기



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여섯 번째 이야기 : "그 활로 나를 쏘거라"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매거진의 이전글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