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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지망생 Jan 25. 2016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볕이 좋은 날이었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줄기, 어느 봉우리에선가 두어 가닥 굵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편평한 그늘엔 솥이 줄지어 걸려 있고, 장작이 이글댔다. 어디서 나는지 모를 고기 타는 냄새가 출렁이는 바람을 타고 와서 코를 간질거렸다.


한 무리의 노인들이 남녀 구분 없이 옷을 벗고 몸에 물을 끼얹었다. 큼지막한 독을 혼자 차지하고 들어앉은 노인은 김이 펄펄 나는 물속에서 ‘으어 으어’ 뜻 모를 소리를 한참이나 냈다. 


벌건 쇳물처럼 몸이 달아오른 노인이 물 위로 일어섰다. 독 아래로 소년 하나가 달려가 엎드렸고, 다른 소년이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엎드린 소년의 등을 밟고 내려온 노인이 팔을 벌렸다. 한 소녀가 다가와 옷을 입혀줬다. 노인이 시중드는 소녀를 희롱하자 소년 소녀들이 고개를 돌렸다. 서로 물을 끼얹던 노인들도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무리 앞에 선 노인이 돌아서서 큰 소리를 냈다.

“여기 사람이 있는가.”

노인의 얼굴은 여전히 벌겋고, 뺨에선 채 닦이지 않은 땀방울이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다시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는가.”

다른 노인들이 외쳤다.

“우리가 있다.”


노인들의 옷은 채 닦이지 않은 물과 땀으로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찰싹 달라붙은 옷자락을 흔들어 떼며 노인들이 다시 외쳤다.

“우리가 있다.”


앞장선 노인이 팔을 흔들어 땀방울을 튕겼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다른 노인들이 외쳤다.

“사람을 찾으러 간다.”


더운물로 목욕을 끝낸 노인들의 목청에는 신명이 그득했다. 한 노인은 “간다”, “간다”를 노래처럼 흥얼대며 몸을 흔들었고, 다른 노인은 뜻 모를 소리를 웅얼대며 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그러면서 노인들의 무리는 앞으로, 위로 나갔다. 봉우리에 가까워지자 고기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앞장선 노인이 나무 아래 주렁주렁 달린 금줄을 헤치고 나갈 때, 뒤따르던 노인들의 다리에선 핏발이 솟았다. 부스럭대는 산길.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평편한 그늘이 나타났고, 노인들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쇳물처럼 달아오른 얼굴 그대로였다.


그늘 아래 차려진 평상 위엔 고기 덩어리가 그득했고, 바닥에 놓인 술독엔 바가지가 떠 있었다. 술독이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엔 배부르게 휘어진 오후의 햇살이 묵직했다.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노인들은 쇳물처럼 땅으로 흘러내렸고, 몇몇은 먹은 걸 바닥에 쏟아냈다. 온통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평상 위 고기 덩어리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고기 주위를 맴돌던 파리들이 토사물 위로 날아들었다.  앞장선 노인이 몸을 곧추세우고 일어나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땅으로 주저앉던 노인들은 그걸 보고 몸을 세웠다. 그리고 다시 봉우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술기운이 가신 코끝에 감도는 토사물 냄새로 노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람을 타고 넘어온 고기 타는 냄새가 섞이면서 더욱 역해졌다. 몇몇은 다시 구역질을 했고, 그때마다  앞장선 노인은 지팡이를 쳐들었다.


봉우리에 다 올랐을 때,  앞장선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뒤쳐졌던 노인들은 잰걸음으로 달려왔고, 근처에서 기다리던 소년 소녀들이 연장을 들고 나타났다. 소년들은 불을 지피고, 쇠를 달구는 사이 이마가 납작한 소녀들은 나무 아래로 처진 금줄을 헤치고 들어갔다. 앞장섰던 노인이 외쳤다.


“내가 선 곳이 어디인가?”


무리 지은 노인들이 답했다.


“거북이 바위다.”


금줄을 헤치고 나온 소녀들은 둥근 항아리를 손으로 굴리고 있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항아리인데, 뚜껑이 없다. 알처럼 둥글고 트인 곳이 없다.


이마가 납작한 소녀들이 알처럼 생긴 항아리들을 땅 위로 굴려 넓적한 바위 아래에 세웠다. 거북이를 닮은 바위 아래엔 곤충의 알처럼 둥근 항아리들이 잔뜩 쌓였다.


“거북이가 알을 낳았다. 거북이 알이다.”


이마가 납작한 소녀들이 외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노인이 다가가 지팡이로 항아리를 내리쳤다. 그리고 노래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얼굴이 벌건 노인들은 소녀들을 쫓아가 부둥켜안으며 노래를 따라 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앞장섰던 노인은 연방 지팡이로 항아리를 내리쳤다. 술기운과 햇살로 달아오른 얼굴에선 땀방울이 땅에 그대로 떨어졌다. 


노인의 얼굴 위로 튀어나온 핏줄이 뱀처럼 꿈틀대던 어느 순간, 항아리가 쩍 갈라졌다. 갈라진 항아리에 맞닿은 항아리가 다시 갈라지고, 그 옆의 항아리가 또 갈라졌다. 지팡이를 휘두르는 노인의 팔뚝에 힘이 들어가고, 노랫소리가 높아질수록 항아리는 더 크게 갈라졌고, 결국 쩍 갈라졌다.


안에 담긴 건 벌거벗은 사람들. 항아리 안에 웅크리고 있던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이  난생처음 귀를 때리는 노랫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달아오른 쇠붙이를 든 소년들이 다가갔다. 


한 소년이 어깨를 잡으면, 다른 소년이 쇠붙이로 항아리 안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지졌다. 


잔뜩 기울어진 햇살 아래 온통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마가 납작한 소녀들이 다가와 비명을 지르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목에 사슬을 걸었다. 여기는 옛 변한의 땅, 가야. 그들은 알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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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알을 품은 섬'


첫 번째 이야기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두 번째 이야기 :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세 번째 이야기 : "활 잘 쏘는 자가 왕 노릇 하는 까닭"

네 번째 이야기 : "화살 맞아도  끄떡없으니 활쏘기란…" 

다섯 번째 이야기 : "화살이 눈에 박히자 가야 전사들은"

여섯 번째 이야기 : "그 활로 나를 쏘거라"

일곱 번째 이야기 : "그들을 나와 함께 황천으로 보내라"

여덟 번째 이야기 : 왕이 제 자식 죽인 자를 접대한 까닭

아홉 번째 이야기 : "죽은 왕은 알에서 태어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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