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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 '회사원'이 되기까지 함께한 수많은 덕질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며 내가 받은 일상의 위로

by 최애일 aisle choi

저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장래희망을 제출할 때 그 칸에 '회사원'을 적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부모님 직업을 적는것에는 아빠 회사원, 엄마 전업주부를 적더라도 다들 항상 뭔가 '발명가','과학자','아나운서','대통령' 등의 거창한 직업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위인전을 한참 많이 읽을 때였고, 다들 그렇게 적다보니 저만 평범하게 회사원을 적고 싶지 않기도 했고, 한편으로 나는 뭔가 거창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타협해서 선생님 정도. 다른 친구들도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23년이라는 긴 인고의 시간과 취업 준비 기간까지 거치면서 오랜 노력 끝에 저도 그렇고 제 주변을 봐도 대부분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거창한 무언가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많이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 나는 별 것 아니구나. 하다못해 회사원도 보통 노력으로 되는게 아니구나. 20대 중반에 취직하기까지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많은 일들을 했는데 결국은 사원증을 목에 매고 점심 시간에 커피 하나 들고 돌아다니는게 제일 행복한 직장인이 되었다는 현실…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드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긴 시간 동안 공부 외에 할 수 있는 건 주로 뭔가 보거나, 듣는 것들 정도 밖에 없었는데요, 왜냐하면 그 때는 어디 갈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취미생활에 돈을 쓸 수는 있지만 학교도 가야하고 공부도 해야하니 남는 시간에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는 정도인데, 그 때 볼 수 있는건 교육적인 것보다는 가급적 비교육적인 것, 보면 즐겁고 행복한 것들이고, 그러자면 주로 취향을 타게 되는데 남자애들은 게임이나 스포츠, 격투기 같은 것이었고 여자애들은 TV에 나오는 잘생기고 예쁜 연예인들을 보고 그들이 무대 위에서 빛나는 모습들인 것이죠.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연예인을 좋아하고 동경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SNS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TV 시청률이 아직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무한도전 키즈나 ‘대세’ 예능 혹은 드라마, 영화 이런 것들이 가능한 시절로 유행어 하나 나오면 다 따라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아이돌도 비슷했는데요, 매스미디어의 시대, 국내 1020으로도 70만 팬클럽 충족이 가능하던 시절이라 저도 그 사이에 연예인들을 참 많이 좋아했고, 몰입하면서 현실의 시름을 많이 잊곤 했던 것 같습니다.


동방신기 카시오페아, 더블에스오공일 트리플에스, 슈퍼주니어 엘프 팬클럽 가입자수가 100만명 이상을 넘어가던 시기도 있었고,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걸그룹으로 가요계 시장을 양분할 때도 있었고, 이후 다양한 시기를 거치는 동안 저도 끊임없이 인기 많은 아이돌을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적극적으로 공방을 뛰거나 팬클럽에 가입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아이돌 앨범을 사고, 노래를 듣고, 콘텐츠를 보는 등 조용히 덕질을 했었고 아니면 뭐 가까운 친구들이랑 얘기하는 정도였습니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지금이야 덕질하던 분들이 어른이 되어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하고, 덕질 문화 자체가 연령대에 상관없이 확산되었지만, IMF를 겪고 난 뒤라 하루하루 먹고 사는게 더 중요했던 어른들은, 그럴 시간에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길 바라셨고 저도 그래서 조용히 좋아하고 말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심지어 저희 엄마는 블로그가 막 시작되던 초창기 딸이 글 쓰는 것도 걱정해서 그러지 말고 공부해서 대학가라고 엄청 말리셔서 그만두어야 했지만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국문과 갔습니다... 그렇지만 엄마 사랑한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일상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전형적인 문과 수학 포기자로서 진작에 손을 놓았지만 주요 과목을 포기할 수는 없어 수능날까지 정말 억지로 잡고 있어야 되지만 하고 싶지 않은 날이나, 중간고사나 모의고사를 망해서 속상한 날에 아이돌 라디오나 음악을 들으며 위로받곤 했습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이 꼭 나쁜 것도, 어른들이 걱정하는 만큼 낭비만도 아닙니다. 학생이라는 역할 속에서, 제한된 환경 안에서 성공을 이루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빛나는 결과를 얻고, 부와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롤모델을 찾는 것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을 롤모델로 삼거나, 열정과 사랑을 쏟을 대상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연예인은, 단순한 인기인 그 이상으로, 꿈과 열정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성공한 사람을 닮고 싶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감동을 함께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도 같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이상적인 롤모델이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각 사회에는 자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유기적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을 연예인만큼 조명하지 않고 충분히 존중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쉽게 롤모델로 삼을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은 단순한 팬심을 넘어, 삶의 위로이자 꿈과 열정을 발견하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덕질은 다른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것. 내 삶을 채워주는 무언가, 소중한 순간들, 결국 내가 가진 결핍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덕질인 것도 같습니다. 이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 연예 산업이 팬장사라는 오명을 쓰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 앞으로도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만 요즘은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합니다. 학생으로서 본분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되거나 일상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거나, 설령 지장을 주더라도 학생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줄 어른들이 있다면,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덕질 유전자가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주변에도 보면 관심 없는 사람들은 죽어도 관심 없고 아무리 영업해도 넘어가지 않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것도 몰두할 수 있는 성향?이라고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도 찾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인생의 낙, 표현, 행복 같은 것이죠.)


지금은 워낙 SNS도 발달하고, 취향도 다양해지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무한 얘기가 가능하기 때문에 조금 더 개인의 취향이라는게 파편화되고, 주류 비주류의 경계가 사라져서 음지의 문화가 양지로 올라오기도 하고, 그런 개념 자체가 희미해지는 시대로 달라진 것 같지만요. 그래서 잠깐 떴다가도 금방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도 하고, 나의 최애인데 누구는 이름도 모르는 그런 상황도 발생하고요.

그렇게 좋아하는 대상도 정말 많아지고 그만큼 좋아하는 이유도 다양해진 시대가 왔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르겠지만 그 마음과 순간이 진심이라는 건 모두 같습니다. 그래서 그 소중한 진심을 함부로 하지 않고, 산업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사자들이 느끼는 만큼의 온도는 아니더라도 존중하고 지켜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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