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선택하는게 아니라 선택당하는 거라더니
그 시기 일에 대한 만족감보다 회의감이 컸던 저에게 직업의 명예를 걸고 당당히 경쟁해서 승자가 되는 프로그램은 큰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크게 세 가지를 하게 되었는데, 우선은 저도 저 사람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 그 과정에서 아무리 고생하더라도 내가 행복한 일을 하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단 그 마음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이렌 :불의 섬>이라는 프로그램 자체에 정말 많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시리즈가 나오는데 일조하고 싶고 어떤 역할로든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OTT 기획 강의도 듣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출연자 중 가장 눈에 띈 한 분을 한 번 직접 만나볼 수 있으면 만나보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이렌 : 불의 섬> 출연자분들중에 많은 시청자분들에게 주목을 받은 분들이 몇 분 계셨지만, 그 중에 제 눈에 제일 띄었던 분은 운동선수 팀의 한 분이었습니다. 경력으로든 피지컬로든 실제로 제일 강하지만 긴장하는 모습이 계속 보여 인간적이더라고요. 올림픽에서는 준비하는 과정은 일부 보여주지만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조명하거나 선수들이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으니 처음보는 모습이었습니다.근데 그렇게 긴장하고도 막상 실전에 나가면 상대를 기세로 압도하여 감히 덤비지도 못하게끔 하고, 주도적으로 공격을 하는게 제일 멋진 그림임을 알더라도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기지를 지키는 역할을 묵묵히 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종이인간에 충실하여 업무상 키보드 파이터는 해봤을지언정 남과 육체적으로 싸워본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는 저에게는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싶더라고요.
그 이후 관심이 생겨 영상들을 찾아보며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 본인 종목으로 국가대표 주장까지 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고 수상도 무수히 해왔지만 그런 노력보다는 좋은 결과만 주목되는 올림픽에서 아쉽게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도쿄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이 막 끝난 시점이었습니다. 쟁쟁한 인재들 사이에서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도의 운동을 수십년간 해오고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많이 힘들었을텐데도 본인의 일을 아직까지 너무 사랑하는 게 느껴지고, 일 얘기만 하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거다. 그게 같은 직업은 아니지만, 어쨌든 한 가지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으로서 제가 가져보지 못한 태도라 뭔가 신기하면서도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직접 한 번 보기나 하자는 생각에 당시 유일한 팬 커뮤니티였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정보를 얻어 마침 있었던 전국체전에 갔다가 직접 보게 되고, 생각보다 성별을 떠나 인간적으로 너무 예쁜 모습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최애로 등극하시어, 제 인생 최대로 열렬하고 적극적인 덕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그 분은 얘기 할 때만 눈을 빛내는게 아니라 그냥 원래 눈이 호수처럼 깊고 반짝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최애를 만나고 오며 도파민이 터졌지만 핸드폰 배터리도 같이 터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뜬 눈으로 4시간 이상 고속 버스를 타고 오며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나에게 좋은 영향을 준 사람을 위해 뭐든 하고 싶다. 그래서 싸이월드 이후로 주로 작성하기보다는 뭔가 필요할 때 보거나, 가끔 이벤트에 참여하는 용도였던 SNS 계정도 팬 활동만을 위해 새로 개설하고, 그 날 찍어온 후기와 영상들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의 팬 문화를 잘 몰랐고 했어도 멀리서 접하는 정도여서 풍선 흔들기나 응원봉 초기가 제 마지막 덕질의 기억이었고 그 이후에는 먹고살기 바빠서 몰랐는데 그 사이 많이 달라진 걸 체감하면서 하나씩 배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정도 활동을 해보니, 우선 제 최애 외에도 팬 문화 자체가 오프라인 팬활동보다 온라인 팬 활동이 훨씬 활발했고 대부분 덕질의 대상을 직접 만나러도 가기 때문에 팬들 간 교류도 꽤 있었습니다. 다만 제 최애를 좋아하는 분들은 몇백명 단위의 소규모이다보니(한줌에 쥐어질 정도라 한줌단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프라인 활동 하시는 분들이 온라인으로도 활발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팬활동은 무조건 오프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온라인으로만 서로의 성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르는 ‘트친’들끼리도 오히려 더 깊은 얘기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팬카페도 있지만 관련 플랫폼들도 많이 있었고, 팬이 소규모인 경우에는 오픈채팅방으로도 운영이 되었습니다. 최애에 관련된 기초 정보를 입장코드로 입력하면 들어갈 수 있었고, 대부분 여러 팬 활동을 거친 분들과 그런 팬 커뮤니티를 운영한 분들이다보니 각자의 룰과 덕질 규칙 등도 나름 있었습니다. 또 생일이나 각종 기념일에 이벤트도 많이 진행되었고, 그 이벤트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그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도 더 많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업도 많이 하고 이벤트를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어쨌든, 그때는 제 최애의 팬 커뮤니티가 콘텐츠 자체의 유행이 끝나가면서 팬이 줄어드는 상황이다보니 운영도 잘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고, 연예인은 아니지만 인지도 있는 공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업으로 비슷한 업무를 하고 있던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익명이니 그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마치 이직을 하듯 일주일을 진지하게 고민하여, 공석이었던 팬커뮤니티 운영진 활동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제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