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거면 차라리 일로 하지!의 마음이 일로 하면 어떨까?로 바뀌기까지
운영진으로서의 출사표를 던지기 전에 고민한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운영진이라는 이유로 ‘최애와 더 가까워진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오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프라인에서 친했던 분들에게 제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익명 속에서 일하는 것이 오히려 평화로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고충이 되었습니다. 숨기기 위해 때로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오프라인으로는 좋은 사람들인데 온라인에서는 운영진을 공격하는 모습도 보고 실망했지만 말할 수 없어 점점 지쳐갔습니다. 약간 스스로 불러운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때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 않구나 라는 걸 느꼈습니다. 온라인에서 의견을 취합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방에서는 운영진이 업무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어쨌든 그 대상과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도요. (정작 저는 일을 하느라 덕질을 할 시간도 없었지만..) 물론 그 와중에도 도움을 주시기도 하고 어려울 때 대신 나서서 얘기해주시기도 하는 빛 같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들 덕분에 계속 버티고 진행해나갈 수 있었지만, 한 번 제대로 해봤기 때문에 이제 제 인생에서 이렇게 적극적인 덕질이나 운영진 활동은 없는 것으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인생의 겨울과도 같은 시련이었지만 고통받으며 저는 비로소 제가 하고 싶은 것에 솔직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계기를 생각해보면 몇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제가 받은 악플(?)아닌 악플중에 그런 게 있었거든요. "돈 받고 하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수천 수만명의 대형 팬덤도 아니고 고작 몇백명 남짓한 팬들을 위해(그중에 대부분은 그나마 최애가 오픈채팅방에 방문할때만 나타납니다) 마치 본업처럼, 혹은 그 이상의 무보수 중노동을 하고도 욕을 먹으니 어느 날 문득 '차라리 이럴 거면 일로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모두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이면서 팬들은 질투하고 최애는 불편해하는 상황도 힘들었고요. 그래서 저는 운영진을 그만두면서 최애도, 덕질도 함께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좋든 싫든, 덕분에 요즘의 팬 문화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배우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꽤 많았습니다. 하나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해내야 했기 때문에 매일 찾아보고 준비하면서 정말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고, 갈등을 겪으면서 팬들의 다양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끝내 이루지 못한 ‘행복한 순간’에 대한 한이 생겨서, 나는 아니었지만 다른 누군가는 온전히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어렴풋이 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현생에서의 이슈도 겹치는 바람에 저는 그동안 수많은 세월 커리어를 쌓아온, 워라밸이 보장되는 안정된 자리를 두고 비로소 제가 원하는 길을 향해 한 발짝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저와 꼭 같은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아이돌이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만큼 탈덕하는 케이스도 굉장히 많은데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최애가 바뀌어서 환승을 하거나, 최애가 범죄를 저지르는 등 실망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팬들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긴다거나 (팬들이 수백 수천씩 투자해서 오는 행사에서 동태눈으로 아진짜요와 같은 성의 없는 리액션만 하는 등), 팬 자신의 개인사가 바빠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관심사가 바뀌는 등 여러 이유가 있는데, 사실 사랑했던 대상을 놓기까지의 마음은 사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수 많은 굿즈는 어쩔 것이며, 내가 투자한 시간과 마음과 노력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요새는 그래서 탈덕 브이로그, 이별 콘서트 등 자신이 사랑했던 기억을 정리하는 순간을 또 기록으로 남기는 경우도 꽤 많이 보이더라고요. 마치 사랑하고 이별하듯, 덕질의 사랑과 이별도 우리의 일상과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