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박해는 광범위하고 절대적으로 커졌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 신자라고 의심만 되어도 관아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모진 고문으로 끝내 배교를 약속하고 풀려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피의 역사 속에서는 고문으로도 꺾이지 않은 신앙의 꽃을 피워낸 성인들이 많다.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피로 물든 큰 박해만 네 번이다. 이들 사이의 시기에도 천주교인들은 계속 박해 속에서 살아왔다. 가장 척박한 곳을 찾아 조선으로 온 프랑스 신부와 선교사들 자발적 신앙으로 천주교의 꽃을 피운 조선의 평신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 곁으로 갈 수 있어 행복해 했다. 이들의 향기어린 피가 가득했던 순교 성지, 끔찍하고 처연한 역사를 간직한 순교 성지가 우리나라에는 많다. 순교 성지는 대부분 당시 각 지역에서 치러지던 처형장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는 서소문이 있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 프랑스에서 온 주교와 신부 등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근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대표적으로는 절두산과 갈매못을 들 수 있다. 반복되는 처형으로 아직도 핏자국이 씻기지 않는다는 절두산의 처형바위와 순교자들의 피로 온 모래사장이 붉게 물들었다는 갈매못 바닷가의 이야기는 그 당시 얼마나 많은 피가 이곳에 뿌려졌는지 짐작케 한다. 믿음의 댓가는 혹독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킨 이들의 삶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믿음의 길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귀감을 주고 있다. 피의 길 위에 핀 꽃처럼, 순교의 길 위에 핀 한국 천주교회의 꽃 향기 짙은, 아름다운 그곳으로 함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