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구미에 갔다. 언니가 셋이나 살고 있는 도시. 셋째 언니와 내가 내려가면 다섯 자매가 다 모인다. 기차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다. 언제부턴가 개찰구에서 열차표를 검사하지 않는다. 차표만 사면 그냥 내리고 타게 되었다. 승차권도 인터넷으로 구매를 하니 종이 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승차자 이름까지 나오니 언니에게 카톡으로 차표를 보내주면 그만이다.
경부선을 타고 지나는 역들은 조치원, 매포, 신탄진, 대전, 옥천, 심천, 영동, 추풍령, 김천, 구미까지다. 학교 다닐 때, 직장 다닐 때도 나는 기차를 타고 다녔다. 지나치는 역마다 추억이 있다. 무궁화 열차를 타고 간 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푸릇한 것들이 보이고 봄기운이 확연했다.
구미역 개찰구를 나가니 큰언니와 형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보다 열여섯 살 위인 큰언니다. 두 분 다 전보다 건강해 보였다. 역 앞에서 점심을 먹은 곳은 언니가 자주 간다는 복매운탕 집. 사람들이 많았지만 다행히 우리가 앉을자리는 남아있었다.
경상도 음식은 갈 때마다 새롭다. 매운탕에 식초를 넣어서 살짝 새콤했다. 매운탕의 신맛이 어색해서 신 것만 빼면 맛있을 텐데 생각했다. 어쨌거나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는 일은 즐거웠다. 처제들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복매운탕을 사주려고 마중 나와 기다리신 형부의 마음만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했다.
매운탕 집에서 나와 차를 한참이나 더 타고 넷째 언니네 동네로 갔다. 구미공단을 지나는 길엔 벌써 목련이 봉긋 피었고 밝은 곳에는 벚꽃 무더기가 하얗다. 입고 간 얇은 패딩도 벗어 들었다. 작은 언니네와 넷째 언니네 식구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젠 자녀들이 독립하고 두 분씩만 남아서 이렇게 형제들이 오면 반가워한다.
마침 아들 전화가 왔다. 통화를 하며 슬며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형제 없이 혼자 자라게 한 아쉬움이었다. 사실은 우리 형제자매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게 가족인 것 같다. 예전에 어찌어찌했다는 추억만을 늘어놓아도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모이면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와 언니들이 기억하는 엄마에 대한 정서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도 농사일을 해야 했으니 언니들은 집안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는 역할을 엄마와 분담했던 것 같다. 나는 막내딸이라 젊은 엄마에 대한 기억은 없다. 늙어서까지 자식들을 위해 고생한 엄마만 보였다.
언니네 공장의 넓은 마당에서 음식을 끓여먹고 밭에서 시금치와 도라지도 캤다. 깨끗하고 비싼 음식점에 갈 수도 있겠지만 주말에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새로운 추억이 되었다. 목재 팔레트를 여러 개 쌓아 올려서 야외용 식탁을 뚝딱 만들었고 빙 둘러서 음식을 먹었다. 시골의 싸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캄캄한 하늘을 볼 때 무수한 별이 떠있었다. 지붕 아래 무쇠 난로에는 장작이 활활 타올랐고 형제들만이 아는 이야기와 농담으로 왁자했다. 너울거리는 불꽃이 우리 얼굴을 붉게 비추었다.
한 가지에 달린 이파리 같은 형제들, 무심히 살다가도 언제든 만나면 변함없는 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