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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Oct 06. 2022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

오만과 편견 들여다보기 3


언어로 인한 고립이 항상 고달픈 것은 아니다. 생경한 억양이 주는 낯선 평안함은 이국의 여행을 그립게 한다. 그러나 독서의 여정에서 좀 더 밀착하고픈 작품을 마주치면 한정된 어휘력을 탈탈 털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다. 대신 번역서 국가권 독자에겐 의미를 곱씹고 비교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미 아는 이야기의 새로운 판본을 쟁이는 이유이다.


번역 비교라니 거창하게 들리는데 나는 그다지 예민한 독자가 아니다. 혐오 주입이나 콘텍스트를 부정하는 수준의 오역만 아니라면 초월 번역조차도 수용한다. 번역은 한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온전한 전달을 위해 애쓰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장르물의 경우 소위 ‘덕후적인 감각’ 또한 고려되어야 하니 충분히 고충이 유추된다. (덕후, 덕질 이 단어들이 싫어 죽겠는데 딱 맞아떨어지는 뉘앙스를 못 찾겠다.) 물론 시스템적 모순이건 역자의 역량이건 비판받아야 할 번역들도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오만과 편견>처럼 너무 많은 레퍼런스가 달린 스테디셀러의 역자들은 각각의 이유로 독려받고 개정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생각한다. 한 가지 언어로 쓰였다 해도 그 문장 안의 영혼은 수천 가지로 해석되니까.

(무단 인용 금지, 예문만 긁어가지 마세요.)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제인 오스틴, 독자여 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https://brunch.co.kr/@flatb201/291

#노생거 수도원, 제인 오스틴의 지하실 https://brunch.co.kr/@flatb201/296

#오만과 편견, 리지 베넷과 세 번의 청혼 https://brunch.co.kr/@flatb201/304

#오만과 편견, 샬럿 루카스의 응접실 https://brunch.co.kr/@flatb201/305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2(예문) https://brunch.co.kr/@flatb201/307

#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삶의 한 부분이 제대로 굴러가면 다른 부분은 삐걱거리기 마련이다. - 브리짓 존스의 일기


재산이 있든 없든 무슬림 남자가 아홉 살짜리 처녀 신부를 원한다는 것은 보편적 진리다. - 테헤란에서 롤리타 읽기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두 문장에서 익숙한 리듬이 느껴질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리드미컬한 아이러니로 빛난다. 원전에서 이 첫 문장을 압도적으로 만드는 힘은 바로 뒤따라 오는 문단에 있다.


부유한 독신 남성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이다.

그런 남자가 새로 이사를 오게 되면, 그 주위 집안들은 이런 진리를 너무나도 확고하게 믿는 나머지 그가 어떤 심정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오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그를 자기 집안 딸 들 중 누군가가 차지하게 될 재산을 여기곤 한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성의 대상화가 훨씬 효율적일 때 무려 남자 주인공을 물질화된 현상으로 대상화해 비꼬고 있다. 이런 뉘앙스는 독자들이 은연중에 리지와 같은 편견을 품은 채 작품에 들어서게 만든다. 리지에 이입된 독자는 로맨스의 기대와 계급적 모욕을 함께 체험하게 된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다아시가 로맨스의 한 축임을 알기에 훨씬 관대하다. 현실에서라면 절대 용납할 리 없는 무례함을 수용할 만큼 말이다. 낙차가 크면 클수록 혐관 로맨스의 매력이 폭발한다. 제인 오스틴의 아이러니가 사랑받는 이유는 로맨스 장르에서 로맨스를 도구화해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노생거 수도원>처럼 격분에 차지 않고도 훨씬 위협적인 함의를 나긋나긋 선포한다.

제인 오스틴은 페미니스트일까?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중 제인 오스틴이 어느 쪽에 근접한 작가인지에 대한 논의만큼 페미니즘 지향에 관한 논의도 여전하다. 제인 오스틴이 이상화 한 사랑-대등한 젠더 권한 아래의 계급 결합은 당대에 요구에 반하는 혁명성이 비친다. 그러나 그 혁명성은 보수적 계급 가치 아래 수행되는 다소 온건한 반동이다. 그럼에도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은 뮤즈나 관념이 아닌 계급 구성원으로서의 ‘실존적 여성’에 관해 또렷하게 질문한다. 동시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제기하고 현실의 여성들이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시대초월적 질문이다.


단 한 줄로도 훌륭한 함의를 구사하는 첫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제인 오스틴에 관한 여러 오독 중에는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에 대한 폄하도 빠지지 않는다. ‘과대평가된 골드 디거’, ‘나이 든 숙녀의 신데렐라 콤플렉스’ 등 따분할 정도로 뻔하다. 이런 오독을 주장하는 이들은 높은 확률로 <안나 카레니나>나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을 어필하려 든다. 제인 오스틴이 개인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예시로 든 작품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독자라면 제인 오스틴이 로맨스로 포장해 벼려둔 함의를 곡해할 리 없다. 단지 특정 책을 알고 있는 스스로가 기특해 어쩔 줄 모르겠는, 이해력도 떨어지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면 책을 왜 읽는 거지 싶다.




국내 판본 비교

굳이 여러 판본을 찾아보는 독자라면 같은 표현을 두고 갈리는 해석들, 원문 충실도 구현에 관심 둘 것이다.

예를 들면 콜린스는 베넷 가로 처음 보낸 편지에 화해를 의미하는 ‘올리브 가지 Olive Branch’라는 표현을 쓴다. 현학적인 표현을 좋아하지만 진부한 수준의 인물임을 보여주는 장치다. 이 표현은 후반부 다른 편지에서 샬럿의 임신을 암시하는데 앞부분과 댓구를 이뤄 콜린스란 인물이 성찰은커녕 변함없음을 묘사한다. 역자에 따라 직역해 원문의 은유를 독자가 유추하게 하거나, 상황에 맞는 의미로 풀어낸 의역을 선택한다. 아래 비교는 그런 차이에 중점 둔 독자의 입장에서 작성했다. 절대 번역가 개인을 품평하기 위함이 아니다.



(최신 발행연도 판본부터 역순으로 표기합니다. 예문은 다음 글에 이어서.)



#더스토리, 2019, 김유미 

원전 초판의 고풍스러운 커버를 복각한 판본이다. 휴 톰슨의 일러스트도 실렸지만 분량상 일부이고 페이지 순서에도 맞지 않아 구색 맞추기로 느껴졌다.

원문의 구조를 따르기보다 풀어쓴 의역이다. 고전의 딱딱한 표현을 현대의 화법으로 교체해 독자 이해도를 높이려는 것으로 느꼈다. 쉽게 읽히지만 전개의 완급, 원전의 분위기나 캐릭터 특징을 살짝 왜곡시킬 교체와 축약이 있다. 두 주인공이 여덟 살 차이인 설정을 염두에 둔 것인지 리지의 어투가 다른 판본에 비해 좀 더 어린 여성처럼 느껴진다.

제인 오스틴 입문자나 고전의 예스런 어투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가 친밀감 느낄 판본이다.



#문학동네, 2017, 류경희

의미 재현에 중점 뒀지만 임의적인 의역이 많다. 전반적으로 보편적 표현을 선택했지만 ‘중뿔난다’, ‘꼴 미운’ 같은 한국식으로도 오래된 단어가 종종 쓰였다. 화법에 있어서도 원전의 배경에 따른 고풍스러움이 아닌 오래된 관습적 표현들이 보인다. 편차가 있지만 자연스럽게 읽히는 편이라 입문자에게는 적합할 듯싶다.



#시공사, 2016, 고정아

기존 판본을 보강한 수준이긴 해도 시공사의 <200주년 기념 제인 오스틴 완역 전집>은 여러모로 정돈된 번역이다. 전체적으로 원문 충실도를 살리려 애쓴 의역 비중이 적절하다. 원문을 따르되 가급적 친숙한 순서의 로컬라이징을 선택하고 있다. 사극에서 ‘사랑합니다.’ 보다 ‘은애하오.’가 분위기를 돋우고 애용되듯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세기의 어투를 사용하지만 생뚱맞은 고어보다 보편적인 구어체를 적용했다. 현재 우리가 쓰는 일상어 중 살짝 격식 갖춘 표현을 선택해 원전의 우아함을 조성하려는 것으로 느껴졌다.

트리비아 수준은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주석들도 적절하다. 초판의 캐스 키드슨 꽃무늬도 개정판의 핑크빛 커버도 아름답기에 해당 출판사를 보이콧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드는 판본이다.



#현대문학, 2014, 이미선

역시 원문을 따르되 친숙하게 읽히는 순서를 선택했다. 그러나 서술형 문장들이 다른 판본에 비해 건조하고 원전보다 딱딱하게 읽혔다. 현대문학과 펭귄클래식 판본은 여러 부분-특히 대화체에서 민음사의 번역을 참고한 것 아닐까 싶은 부분들이 꽤 보인다.

주석의 분량은 시공사와 비슷한데 본편 뒤에 부록처럼 실려 불편하다. 휴 톰슨의 일러스트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천지인, 2014, 김지선

북 디자인이 무척 예쁜 판본이다. 휴 톰슨의 일러스트가 원전 구성대로 빼곡히 실려 본문만 보면 초판본 분위기가 물씬하다. 일러스트 때문에 번역과 별개로 시리즈를 모두 모을까 했는데 <오만과 편견>, <엠마>만 발행되었다.

서술형 문장의 원문 충실도가 좀 들쭉날쭉하다. 첫 문단부터 ‘찜’ 같은 현재의 조어를 사용하는데 대부분 밀착되지 않는다. 초월 번역이라기에 애매한 한국식 관용어구도 심심찮게 쓰였다. 친밀한 어투로 대화 부분이 쉽게 읽히지만 원전보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펭귄코리아클래식, 2014, 김정아

<펭귄 클래식>의 꾸준한 발행은 고전 읽기의 길잡이 중 하나다. 컬러 블록 위의 펭귄으로도 만족스럽지만 한정판 하드커버들은 넋을 잃고 보게 된다. 윌리엄 모리스 풍 패턴으로 작품의 정체성을 시그니처화 한 코랄리에 빅포드 스미스 Coralie Bickford-Smith의 디자인은 의미를 유추해보는 즐거움까지 준다. UK판과 디자인은 달라도 국내에도 몇 작품이 클로스 바인딩 하드커버로 발행되었다. 생각보다 수요가 없었던 건지 제인 오스틴의 필모에선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 두 권 발행에 그쳤다. 빈티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종이에 본문 가독성도 훌륭하다.

특히 비비엔 존스 Vivien Jones의 입체적인 해설은 본편과 무관하게 읽어볼 가치가 있다. 개별 찾아보기는 몹시 불편하지만 펭귄 판본답게 주석마저 훌륭하다.


같은 출판사는 아니지만 김정아 번역가의 <폭풍의 언덕>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래서 기대를 품었던 펭귄판 <오만과 편견>은 무척 당혹스러웠다.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독신의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다들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펭귄 판본 첫 문장은 여타 판본들처럼 평어체로 끝나지만 이후의 모든 서술은 경어체가 사용된다. 재치 있게 끊어 쓰긴 했어도 유독 첫 문장만 평어체로 쓰여진 건 결국 경어가 이 작품의 화법에 대한 오랜 인상에 대치되기 때문 아니었을까?

이번에도 여러 번 읽어보았는데 이 판본의 서술에 쓰인 경어는 무척 찜찜하다. 경어를 쓰는 여성 서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관찰자여야 할 전지적 화자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자기 고백 같은 서술은 후반부로 갈수록 유치한 동화적 화법으로 느껴져 몰입을 방해한다. 이런 화법이 은연중에 주입하는 수동성은 제인 오스틴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번역가와 편집진 중 어느 쪽의 의도가 반영된 건지, 왜 그런 선택이 채택된 건지 궁금하다.

#앵무새 죽이기, 수줍고 평범한 악 https://brunch.co.kr/@flatb201/172



#을유문화사, 2013, 조선정

제인 오스틴에게 관심 가진 후 내가 처음 읽어본 인문서는 <Becoming Jane Austen, John Spence>이었다. 영문판이기도 했지만 가계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기에 무수히 반복되는 제인과 존과 에드워드와 기타 등등.. 휴우.. 몹시 따분했다. 내용도 결국 기존의 알려진 범위이라 허탈했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제법 이해한 시기에 읽기도 했지만 조선정 번역가의 <제인 오스틴 여성적 글쓰기, 민음사, 2012>는 성실한 인문서다. 쉽게 읽히면서도 18세기 여성 작가들에 대한 조망을 키워드로 분류해 명료하게 짚어준다. BBC, 워킹타이틀의 드라마와 영화들, <유브 갓 메일>의 노라 애프런, <브리짓 존스 일기>의 헬렌 필딩 같은 로맨스를 보강한 계승자들로 시작해 영문학에 관심 없는 독자도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마니아급 팬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겠지만 제인 오스틴 입문자라면 반드시 읽어보길 추천한다. 때문에 조선정 번역가의 을유 판본을 무척 기대하며 읽었는데 그렇게 흡족치는 않았다.


을유 판본은 원전의 구조를 따라가려 하나 축약된 부분이 꽤 많다. 내용 전개에 영향을 주진 않지만 지나치게 함축적이거나 중역 느낌의 문단들도 빈번했다. 화법이 다소 들쭉날쭉한데 일부 대화체는 너무 극적이기까지 해서 감정 과잉으로 느껴진다. 당황해서 아무 말 잔치 중인 대사가 비아냥으로만 느껴진다거나 회환 섞인 가정법이 단정하는 것처럼 표현되는 등 충분히 오독될 부분들이 있다. 치렁치렁 예의 차린 리젠시 시대의 화법에서 우아함은 휘발되고 감정만 남은 것처럼 읽혔다. 그러나 원전과 비교해 보려는 독자는 읽어볼 만한 판본이라 생각한다.



#열린책들, 2010, 원유경

민음사와 시공사 판본 사이에 가장 오래 읽은 판본이다. 현대화법과 절충하면서도 원문의 구조를 충실히 재현하는 쪽을 선택한 번역이다. 읽을 때 종종 딱딱하게 걸리는 부분이 많은데 번역상의 미숙함이라기 보단 원문 충실도에 대한 고심으로 보인다. 구어체에서 생략해도 무방한 ‘당신을’, ‘나는’ 같은 부분마저 꼼꼼하게 표기했다.



#민음사, 2003, 윤지관 · 전승희

너무 오래, 많이 읽은 판본이어서 친숙함을 충실함으로 느끼는 건지 생각해 본 판본이다. 민음사 판본은 적어도 국내 단행본의 기준이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원문 충실도를 살리면서 유연한 의역이다. 열린책들 판본이 원문의 구조를 재현해 충실도를 높였다면 민음사 판본은 의미를 재현할 수 있는 뉘앙스에 더 신경 썼다고 느꼈다. (물론 추측일 뿐, 오해라면 모두 제 탓입니다.) 특히 첫 문장 첫 단어인 ‘재산깨나’에 살짝 배어든 한국식 빈정거림은 로컬라이징 특유의 재치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입장과 화법을 딱 알겠어서 바로 다음 문장이 읽고 싶어 진다.





@출처 및 인용/

Pride and Prejudice, Jane Austine, 1813

Pride and Prejudice (Belknap Press, 2010, 일러스트 휴 톰슨 Hugh Thom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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