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들여다보기 6
절판책을 모으다 보면 현재라면 이 판본을 샀을까 싶을 때가 있다. 책의 영혼을 이루는 것은 분명 메시지지만 멋진 작품이 합당한 모양새를 갖추는 것은 궁극의 충족감을 준다. 때문에 북 디자인은 서사의 일부이자 시각적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북 디자인은 읽기에 대한 단순한 독려를 떠나 그 작품을 요약하고 은유한다.
꼿꼿한 작가적 자부심에도 숫자 앞의 제인 오스틴은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선금은 항상 한미 했고 푼돈까지 탈탈 털어 자비출판을 부담했다. 출판업자가 몇 년간 처박아두기만 해 판권을 되사오기도 했다. 유명세에는 수익이 아닌 귀찮은 간섭들만 따라왔다. 제인 오스틴의 견해와 별개로 기어이 <엠마>의 헌사를 받아 낸 나르시시스트 섭정 황태자는 판매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만과 편견>의 고무적인 기대감도 수익과는 별개였다. 입소문이 영국을 넘어선 덕에 <오만과 편견>의 해외 판본이 발행되었지만 미스터 다아시 위주의 무단 편집본이 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인 오스틴의 함의들은 문장이 아닌 시각화의 시대를 맞아 폭넓게 변주된다. 함의보다 낭만성이 강조된 출판물들은 제인 오스틴 사후 비로소 수익을 창출해낸다. 아직도 기준이 되는 영상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제인 오스틴이 오독되는 이유에는 이런 후대의 변주들이 제법 기여했을 것이다.
#서쪽 숲 나라, 오만과 편견 https://brunch.co.kr/@flatb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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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첫 문장, 오만과 편견 번역 비교 1(판본) https://brunch.co.kr/@flatb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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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그리고 팬픽 https://brunch.co.kr/@flatb201/308
#제인 오스틴과 펭귄 https://brunch.co.kr/@flatb201/310
#제인 오스틴의 숙녀들은 왜 걸어 다닐까?
#의뭉스러운 숙녀들
산업화의 수반으로 도약한 인쇄술은 고급 출판물 시대를 연다. 짧아서 더욱 강렬한 잔상을 남긴 골든 에이지 출판물들은 현재까지도 수집 열기가 높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도 함의보다 낭만성을 강조한 선물용 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휴 톰슨 Hugh Thomson의 선물용 책은 현재까지도 거듭 복간될 정도로 고전적인 화려함을 과시한다. 삽화가 휴 톰슨은 꼼꼼한 고증의 유려한 풍속화로 사랑받았다.
무엇보다 휴 톰슨은 이미지 언어로서의 일러스트를 구사했다. 삽화가에게 요구된 장면 재현에 그치지 않고 문장이 가진 함의를 시각화된 스토리텔링으로 변주했다. 셰익스피어,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 고전 작업이 트레이닝이 되었다. 특히 <크랜포드 Cranford, Elizabeth Gaskell>의 성공은 당시 유행한 호화 장정 책의 기준을 선도하며 톰슨 스타일을 정착시켰다. 동시대 찰스 & 헨리 브룩 Charles Edmund Brock, Henry Matthew Brock, 크리스 해먼드 Chris Hammond가 그 기량에도 휴 톰슨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다.
알렌 레인은 친구 애거서 크리스티의 시골 저택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다. 기차 여행에 지루해진 그는 자문한다. ‘왜 이렇게 만만한 읽을거리가 없지?’
무수히 명예로운 작가를 보유했음에도 영국 문학 시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큐레이션을 고수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2절판 금박 전집 같은 고급 출판물 시장은 사멸되었지만 제대로 된 책이란 여전히 하드커버 양장본을 의미했다. 기존 문고판들은 중구난방이었고 옐로 페이퍼백들은 명칭대로 저급한 소비성 가십지였다. 입지전적 출판인 알렌 레인 Allen Lane은 담배 한 갑 가격의 ‘싸고 가볍고 재미있는 책’을 구상한다. 어떤 장르를 읽건 단박에 어느 출판사의 책인지 알 수 있는 강렬한 컬러와 인상적인 아이콘이 주도하는 브랜드, 싼 가격이지만 드러내 놓고 읽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휴대가 편한 책!
아이디어가 떠오른 그 해 알렌 레인은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무기여 잘 있거라> 같은 당시의 인기 현대 작가들의 작품 열 편을 문고판 시리즈로 발행했다. 현재까지도 페이퍼백을 대표하는 ‘펭귄 북스 Penguin Books’의 시작이다.
엘리트주의자들의 냉소에도 펭귄의 책들은 첫 해부터 거대한 성공을 거둔다. 보수적인 서점계가 하드커버도 아닌 현대 작품들 비치를 꺼리자 알렌 레인은 서점 밖 판매처를 모색한다. 결정적 수익을 일궈낸 곳은 이 시리즈의 컨셉에 어울리는 울워스 마켓*의 대량 주문이었다. (*저렴한 가격대의 잡화를 모아 판다.) 작가의 이름을 크게 박아 넣던 기존 관행을 탈피해 일관된 브랜드를 강조한 디자인은 시너지를 내었다. 심지어 냉소주의자 중 한 명이었던 조지 오웰의 <1984, George Orwell>는 커버의 상징성으로 인해 후일 이 판본의 가장 인상적인 결과물로 자리한다. 콘텐츠도 빅토리아 시대 고전 외에 당시의 현대 작가들 작품을 선별한다. 장르별로 다른 컬러링을 적용해 직관적인 브랜드 각인을 어필했다. 통일된 디자인으로 절감된 비용은 일종의 책 자판기인 펭귄큐베이터 Penguincubator 등의 프로모션에 활용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펭귄 북스는 뜻밖의 전환점을 맞는다. 생필품 외에는 모든 것이 배제되던 암울함 속에 펭귄의 책들은 적은 돈으로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해소가 된다. 거기에 다 읽은 책을 전선에 기부 보급하는 전시 캠페인 Forces Book Club을 시행한다. 어떤 군인이든 ‘펭귄 포켓’이라 불린 군복 무릎 주머니 안에 귀여운 펭귄 한 마리를 둘 수 있었다. 이 캠페인으로 브랜드 친밀도가 높아졌을 뿐 아니라 펭귄 북스는 타 출판사에 비해 좀 더 원활히 용지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진보 성향의 알렌 레인은 1차 세계대전부터의 계급 붕괴와 서프러제트에 주목했다. 서점의 주요 고객이 젠체하는 성인 남성들 대신 새로운 세대의 청소년과 여성으로 채워질 것을 간파했다. 기존 라인을 전통 고전을 선별한 클래식 Classic, 좀 더 심화된 인문 콘텐츠를 다루는 펠리컨 Pelican,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퍼핀 Puffin 에디션으로 세분화해 정비한다. 펭귄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보수적 고전에서 벗어난 친숙한 문고판들을 미니스커트처럼 힙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혁명적인 접근성은 소장보다 읽는 것이 주요한 모두의 책이 시작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브랜드 혁명성도 시장 경쟁 앞에 완고할 수는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자 다양한 스타일의 출판물에 독자들이 분산되었다. 거기다 책은 TV, 라디오 같은 새로운 미디어들과도 경쟁해야 했다. 1970년 펭귄 북스의 정신인 알렌 레인이 사망하자 브랜드 정체성이 일시적으로 와해되기까지 했다.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펭귄의 책들은 현재의 마카롱 에디션처럼 블록 배리에이션을 변주한 스타일과 큐레이션에 맞춘 개별 스타일이 도입된다. 기존의 클래식 에디션 또한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등 시대가 변하며 거듭 재평가된 고전 작가들 위주의 기획전집이 여러 차례, 여러 판본으로 발행된다.
특히 2000년대 중반 발행된 패브릭 양장본 <펭귄 클로스바인드 에디션 Penguin Clothbound Edition>은 다시 한번 시장 트렌드를 주도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온전한 브랜드의 힘이라기보단 북 디자이너 코랄리에 빅포드 스미스 Coralie Bickford Smith의 스타성에 기대 있다. 하드커버 양장본만이 책으로 정의되던 시대에 알렌 레인이 역으로 양질의 문고판을 떠올렸듯 펭귄 프레스 디자이너로 재직 중이던 코랄리에 빅포드 스미스는 전자책과 문고판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리고 책을 읽기보다 굿즈로 소장하는 시대에) 고전적 방식으로 제본된 하드커버 시리즈를 구상한다. 빅토리아 시대 양장본에서 영감 받은 스미스는 대대로 물려질 수 있는 전통적 개념의 책을 재현하고자 했다. 윌리엄 모리스에서 영감 받은 고전적인 패턴은 낭만성에 부합하는 복고적 분위기로 압도적인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반짝 돌풍을 일으키며 서적뿐 아니라 여러 장르에서 모사되었다.
#Penguin Clothbound Edition https://shop.penguin.co.uk/search?q=Clothbound+Classics
#펭귄코리아의 클로스바인딩 https://brunch.co.kr/@flatb201/306
‘소장하는 것이 아닌 읽는 책’이라는 기준은 펭귄의 모든 라인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퍼핀 Puffin 에디션은 대상을 고려해 예외였다. 초기 퍼핀 시리즈는 그림책과 스토리 북으로 나뉘어 발간되었다. 당대의 현대 작가 발굴에 공을 들였고 영국에 소개된 첫 번째 무민 Moomin도 퍼핀 그림책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기존 스테디셀러를 청소년 대상으로 편집한 스토리 북은 본문 일러스트는 없지만 커버는 관용적으로 운영되었다. 특히 시장 경쟁이 치열해진 196, 70년대는 각종 키치 한 일러스트 표지가 도입되었다. 그로 인해 이 시기 빈티지 펭귄 북 수집 열기가 높다.
#비밀의 화원, 빈티지 펭귄 북 커버 https://brunch.co.kr/@flatb201/269
터키의 일러스트레이터 훌리야 오즈데미르 Hülya Özdemir가 커버를 그린 <퍼핀 시스터후드 에디션 Puffin The Sisterhood Edition>은 강렬하고 아름다운 조형성을 과시한다. 스타일 상으로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르누보에서 영감 받았지만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현대 여성상을 구현하는 것이 관심사라고 한다. 그래선지 필모를 채운 수많은 여성 인물화가 지루할 틈이 없다. 탄탄한 데생과 수채화임에도 강렬하고 화려한 컬러에 개인적으론 프리다 칼로가 연상되었다.
브랜드 타이틀부터 여성 청소년이 타겟인 이 판본은 <Pride and Prejudice>, <The Railway Children>, <A Little Princess>, <Little Women>, <Anne of Green Gables>, <Heidi>가 일괄 발간되었다. 본문 삽화는 없는 페이퍼백인 듯한데 그나마도 국내에는 발행되지 않았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통 출판사 중 하나인 맥밀란 Macmillan은 아동 문학에 있어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글 북> 같은 무수한 정통 고전을 발행하며 영국 아동 문학 역사의 한 축을 만들어왔다. 베르나르다 브라이슨 Bernarda Bryson이 삽화를 그린 <Pride and Prejudice>는 청소년 대상으로 편집된 판본으로 보인다. 펭귄 판본은 아니지만 다양한 일러스트가 입혀지던 1960년대 퍼핀 에디션들과 경쟁하던 시기의 작품이라 골라보았다. 역시 베르나르다 브라이슨이 삽화를 그린 <Wuthering Heights>를 좋아해 검색하다 발견한 판본이다.
사회참여적 작품을 많이 남긴 석판화가 베르나르다 브라이슨은 1940년대부터 일러스트를 주로 작업하다 1960년대 들어 아동 문학 관련 창작 및 삽화 작업으로 커리어를 확장한다. 고전 스타일이 아닌 삽화가 수록된 판본이 희소하기도 하거니와 제인 오스틴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1960년대 분위기 낭낭하면서도 유니크한 데생이 너무 멋지다. 실물 책을 꼭 한 번 보고 싶은 판본이다. (구하기 어렵진 않은데 너무 심하게 비싸다)
@출처 및 인용/
Penguin Books Official https://www.penguin.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