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문을 두드립니다.
내가 대답을 하고 문을 열자, 당신은 천천히,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어 들어와, 내가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당신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최대한 등을 꼿꼿이 하고 앉았습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보니, 떨고 있는 왼손을 오른손이 간신히 붙잡고 있는 형태였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온 이유를 알지만, 나는 당신에게 물어봅니다.
"왜 저를 찾아오셨죠?"
"선생님이 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노력을 해보고 싶고..."
왼손의 떨림이 더 심해지는지, 당신이 오른손으로 왼손을 강한 힘으로 내리누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신 후 말합니다.
"죽은 딸이 자꾸 저를 찾아와요."
당신은 작년 여름에 여행 중 교통사고로 죽었던 딸이 두 달 전부터 자신을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딸이 절 찾아온 게 느껴지면 너무 무서워서 저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아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죠? 이미 병원에서도 트라우마로 인해 환각을 본다면서 약을 처방해 주더군요. 그 약은 절 재워요. 자고 있으니, 딸이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죠."
"주로 어떤 순간에 딸이 찾아오시는 것 같나요?"
나는 당신의 말에 대한 정당성을 찾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이 지나치게 떨리는 것 같아, 나는 당신의 손 위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얹습니다.
"그냥... 매번 달라요. TV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제 옆에 같이 앉아있다든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딸이 절 쳐다보는 게 느껴져서 눈을 살짝 떠보면 침대에 앉아서 절 쳐다보고 있더라고요. 며칠 전에는 제가 부엌에 있다 돌아봤는데, 딸이 자기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것도 봤어요. 제가 방을 안 치워서 그런가... 모르겠어요."
"죽은 딸을 만난다는 게 어떠세요?"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한번만 더.... 보고 싶다고 그랬다는데... 막상 날 찾아오는 딸을 보니깐 너무 무섭기만 해요... 딸이 그만... 왔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흐느껴 웁니다. 공포와 슬픔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따님은 어머님께 어떤 딸이었나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데다가, 아버지 없이 혼자 키운 딸이었어요. 공부도 잘해서 학원도 제대로 보내주지도 못했는데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에 알아서 들어가고. 제가 등록금을 못 보태줘서 아르바이트하면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학교 들어간 지 채 1년도 안 되어서......"
당신은 또 한 번 크게 웁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진정될 때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기다린 후, 당신이 조금 진정되었다고 느껴질 때 다시 질문했습니다.
"따님이 왜 찾아온다고 생각하세요?"
처음으로 당신이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봅니다.
"딸은 절 많이 챙겼어요. 그래서 찾아오는 것 같아요. 홀로 남은 제가 걱정되어서?"
"혹시 딸이 나타났을 때 말을 나눠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오...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하면 딸이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을까요?"
당신은 한참 말을 하지 않고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제가 집에 혼자 있지 않기를 바랄 것 같아요. 그래서 딸이 살아있을 때처럼 활기차게 생활하면 안 올 것 같아요."
"활기차게 생활하기 위해 시도해 보실 수 있는 거 어떤 게 있으세요?"
"음, 예전에 나가던 교회에도 나가고 모임에도 참여해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 싶어요. 그 사람들은 제가 딸을 잃은 것에 대해 다 알고 있거든요."
딸이 찾아온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을 한동안 안 만났는데, 다니던 교회에도 다시 나가고 사촌동생들하고도 좀 만나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집 근처 강변에서 운동을 하겠다고도 하고요.
"딸이 바깥까지는 따라오지 않긴 해요. 정말 제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외로울까 봐 찾아오는 것 같아요."
이 주후, 당신은 좀 더 밝은 표정으로 날 찾아왔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발걸음도 좀 더 가볍고 경쾌해졌고요.
"전보다는 아니지만, 아직도 딸이 가끔 찾아오긴 해요. 딸이 저를 걱정해서 찾아오는 것 같으니, 엄마 걱정하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적힌 쪽지를 딸이 찾아왔을 때 보여줬어요. 딸이 저한테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정확하게는 못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전처럼 딸이 무섭지는 않았어요. 아직도 제대로 마주하지는 못하겠지만요."
"친구분들은 좀 만나셨나요?"
"네. 예전에 다니던 교회 사람들도 만나고 운동도 좀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딸이 전보다는 덜 찾아와요."
나는 당신에게 계속 사교적인 모임에 참석하라고 하고 다음에는 언제쯤 만났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옅은 미소를 띠며 이주 후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고, 우리는 이 주 후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리고 죽은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당신이 영혼의 거친 광야(알펜 룰펠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음이 짐작되더군요. 영혼의 광야는 'limen'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limen이라는 라틴어는 '문지방' 혹은 '경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의 전이지점, 즉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물리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경계선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집의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문지방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안과 밖, 일상과 비일상, 안전과 위협, 신성과 속성을 나누는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딸의 죽음은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넘어가는 사건이죠. 이제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삶의 공간에 있을 수 없는.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보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죽음을 부정하거나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과정에서 애도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거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 머물고 있었던 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이 딸의 부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즉, 당신은 '이곳'에 남고 딸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서 그 사건을 경험한 것이라 할 수 있어요. 갑작스러운 사고로 딸을 잃게 되어 상실감을 느끼게 된 당신의 마음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아픔을 느끼고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 본 이야기는 심리상담사인 Insoo Kim Berg의 상담 사례를 재구성하여 극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