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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Aug 11. 2023

행복

“집을 나간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에 나가신 것 같아요.”

경찰의 말에 은수가 대답했다.

“치매 증상은 심합니까?”

“아직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요. 자식들도 다 알아보고 아마 제 전화번호도 기억하실 거예요.”

희수가 말했다.

“일단 저희가 그 시간대 위주로 주변 CCTV부터 분석해 보겠습니다. 보호자들은 일단 집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꼭 좀 찾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희수가 경찰에게 말했다.

“네, 걱정 마십시오. 금방 찾을 겁니다.”     


만봉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자리에 털썩 앉았다.

“내 잘못이야, 네가 도착한 후에 출발했어도 됐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자책하지 마! 그렇게 따지면 내 잘못이 더 커. 좀 더 일찍 출발을 했어야 했는데......”

은수가 말했다.

“아빠가 설마 일부러 집을 나간 건 아니겠지?”

멍하게 있던 희수가 말했다.

“일부러 왜?”

“나도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아빠가 일부러 집을 나갈 이유가 없잖아. 그냥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거겠지.”

은수의 말에 희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 만약에 아빠 잘못되기라도 하면 못 살 거야.”

“그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은수가 희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아침에 아빠가 좀 이상했어.”

희수가 핏기가 없어진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다니?”

“날 안아보자고 하더니 고맙다고 했어.”

“진짜야?”

“응, 그런데도 난 그런 아빠를 혼자 남겨두고 시댁으로 가버렸어. 고작 시어머니 생일상 차리겠다고.”

“언니도 몰랐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 이혼할 거야.”

희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그건 무슨 소리야?”

“생일이 뭔데? 고작 자기 생일상 차리라고 며느리인 날 부려먹었잖아. 내가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이모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했어.”

“사돈 이야기 하는 거야?”

“올 해도 오고 내년에도 찾아오는 생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지금껏 일흔 번도 더 받아먹은 그 생일이, 그 나이에 고작 생일이......”

희수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은수가 희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빠 별일 없을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그리고 이혼이라니, 형부가 언니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면서.”

“그 사람 여자가 있어.”

희수가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빠가? 뭘?”

“지난번에 아빠가 나한테 그랬어, 강서방 젊은 여자랑 바람났다고, 그런데 난 그걸 귀담아듣지 않았어. 아빠가 뭔가 착각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럼 정말 형부가 바람이라도 났다는 거야?”

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희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개자식을!”

“앉아!”

흥분하는 은수에게 희수가 말했다.

“누군데? 형부가 누구랑 바람이 났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냐.”

“그럼 뭐가 중요한데?”

“난 아빠 말을 믿지 않았어. 안 그러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치매에 걸린 노인 취급하고 있었나 봐.”

“그건 사실이잖아.”

은수가 말했다.

“아빠가 많이 외로웠을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아빠한테 너무 미안해. 아무도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고 병든 노인 취급만 했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희수가 자책하듯 말했다. 그때 희수의 휴대폰이 울렸다.    

 

운 좋게 발견한 아늑한 장소에 자리 잡고 앉은 만봉은 고개를 빼서 아래쪽에 위치한 추모공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아내의 묘가 보였다. 추운 날씨 탓에 오가는 사람이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아까 거기에 있을 걸 그랬지.”

“꾸역꾸역 이곳으로 올라올 때는 언제고?”

어린 만봉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우리 마누라 옆에서 죽으려고 했는데, 뭐 여기서도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니 그렇게 나쁜 자리는 아니야.”

만봉이 아래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이제 드디어 죽을 거야?”

늙은 만봉이 어린 만봉을 보았다.

“넌 내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어차피 죽을 거잖아.”

만봉이 어린 만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어차피 죽을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소주나 한 병 사 올 걸 그랬지?”

“소주는 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내가 담을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잖아.”

“그래서?”

“그러니 이 아름다운 세상 더 아름답게 기억하도록 소주 한 잔만 딱 마셨으면 해서.”

“소주랑 수면제를 같이 먹으면 간에 부담이 많이 갈 텐데.”

“넌 정말 아는 게 많구나. 간이 좀 망가지더라도 소주 한 잔 딱 마시고 싶군 그래.”

“그럼 다시 내려가서 사 오는 건 어때?”

어린 만봉의 말에 늙은 만봉은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주머니에서 다시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린 만봉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만봉을 보았다. 손에 약을 쏟던 만봉이 말했다.

“몇 알을 먹어야 하는 거지?”

손바닥에 약을 모두 쏟아붓고 만봉은 손가락으로 개수를 세듯 약을 만지고 있었다.

“다 먹어야 하지 않을까?”

어린 만봉이 말했다.

“참! 아까 저기 밑에서 몇 알을 흘려버렸는데 그럼 부족한 건 아닐까?”

“부족하면 어떻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음......”

만봉이 약을 꼭 쥐고 생각에 빠졌다

“설마 안 죽는 건 아니겠지?”

“안 죽으면?”

“그냥 잠든 채로 계속 있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않군.”

“뭐가?”

“그냥 죽지 않고 계속 잠만 자는 거.”

“그러면?”

“그렇게 되면 몸이 썩는 일도 없을 거고 계속 잠이 든 상태이니 자식들에게 짐이 될 일도 없을 거 아냐.”

“그러다가 누가 발견해서 네 위를 깨끗이 씻어내면?”

“아! 그럴 수 있겠군, 그냥 깔끔하게 죽는 게 좋겠어.”  

   

희수가 전화를 받자 민준의 큰소리가 전화기 건너에서 들렸다.

“아무리 아버님이 안 보인다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지금 그거 따지려고 전화했어?”

“처제한테 맡겨두고 당장 방배동으로 가!”

“당신은 우리 아빠가 없어졌다는데 걱정도 안 돼?”

“그냥 앞에 산책 가셨나 보지, 지금 어머니 화가 많이 나셨어. 얼른 방배동으로 돌아 가!”

“내가 왜 그래야 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지금 며느리로서 할 소리야?”

“그 며느리 이제 안 하려고.”

“뭐?”

“당신 집안 며느리, 그리고 당신의 아내, 오늘로 다 내려놓을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 미쳤어?”

“강민준! 우리 이혼해!”

“야! 아니 희수야! 서현엄마! 갑자기 왜 그래?”

민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를 끊으려는 희수의 손을 잡았다.

“왜 그러냐고? 생각해 보니 내가 참 바보처럼 살았더라고, 난 그냥 서현이의 엄마, 당신 집의 며느리, 아빠의 딸, 그저 그게 다인 사람이었더라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알았어,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들었거든. 그래서 이제는 내 인생을 좀 살아볼까 해.”

순간 민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당신 설마........”

“아빠부터 찾고 나서 이혼서류 보낼게.”     


만봉이 고개를 빼고 추모공원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에 가득 차있는 수면제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모자라는 건 아니겠지?” 

“지금 가진 것만 해도 많아 보이는데?”

“하긴, 우리 서서방처럼 착한 사람이 장인 죽으라고 사준 수면제를 야박하게 딱 맞게 샀을 리는 없어. 암! 넉넉히 샀을 거야. 고작 몇 알 흘렸다고 해서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손바닥을 보며 고개를 두 번 끄덕인 만봉은 결심한 듯 들고 있던 약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생수병의 뚜껑을 열어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수십 개의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내려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만봉은 그 약이 안전하게 위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생수를 조금 더 마셨다. 그러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었다. 몸속에 남아있는 살아있는 공기를 모두 빼내기라도 하듯이. 

약이 위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앉아서 기다린 후 주변의 자리를 손으로 툭툭 털어 땅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아내의 묘를 다시 한번 눈에 담고 다리를 쭉 뻗고 자리에 누웠다. 한겨울임에도 만봉은 누운 자리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어린 만봉이 늙은 만봉을 빤히 보다가 옆으로 와서 나란히 누웠다.

“어때?”

“뭐가?”

“기분이.”

“따뜻하고 편안해서 좋군.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

“어째서?”

“평생 일해서 모은 돈으로 편안히 죽을 약을 사 먹을 수 있었잖아.”

만봉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나간 인생이 어땠어?”

“지나간 인생이라.”

만봉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자?”

“아니, 지나간 내 인생은........”

“자?”

“응.”

“내 말에 대답해 주고 자.”

“넌 정말 끝까지 날 괴롭히는군. 지나간 내 인생은 음....... 조금 후회스러웠고 아주 많이 행복했어.”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이젠 정말 졸립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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