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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둘 Aug 11. 2023

에필로그

            

  

안치실에서 형사에게 유서를 건네받은 은수는 풀로 꽉 봉해져 있던 봉투를 열었다. 은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은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나의 죽음에 즈음하여.......     


나의 80년 인생은, 참! 내가 80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희수가 나더러 80살이라고 하니 그렇게 살았나 봅니다. 나의 80년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돌아보니 어찌나 순식간에 지나가고 말았는지 아쉬울 따름입니다. 다만 더 아껴서 쓰지 못하고 흘려버린 시간들에 대한 후회는 좀 남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도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군요. 

부디 모두들 시간을 아껴서 쓰기 바랍니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난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행복했던 시간들은 지금 떠나려는 내게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이 이렇게 조금이라도 맑을 때 스스로 인생의 마지막을 매듭지을 수 있다는 부분에 특히 감사합니다.

많이 고마웠고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난 이제 아내의 곁으로 가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딸들 보거라.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나를 찾았다는 말이 되겠구나. 너희들과 상의 없이 떠나는 나를 용서해 다오. 난 너희들이 이 못난 애비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지금 비록 너희들 몰래 떠나지만 부디 너무 오래지 않아서 나를 찾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 찾아서 너희 엄마 옆에 꼭 같이 묻어다오.


사는 동안 너희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은 했다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구나.

먹고사는 일이 뭐가 그렇게 바빴던지 가장 소중한 너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게 참 많이도 후회가 된다. 인생에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젊었을 때는 잘 알지 못하다가 이렇게 죽기 전에 깨닫게 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너희들은 부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이 부족한 애비 밑에서도 둘 다 훌륭하게 커줘서 정말 고맙다.


희수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딸.

넌 강서방, 아니 강민준이 놈과는 헤어졌으면 좋겠구나. 딸이 이혼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마는 감히 내 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놈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구나. 그놈은 바람만 피울 뿐만 아니라 거짓말도 일삼는 놈이다. 거짓말을 그렇게 표정도 변하지 않고 일삼는 놈이니 결코 좋은 인간은 아닐 것이다. 내가 그동안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모양이야.

........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희수 너의 행복이다. 그러니 네 인생을 찾아서, 오직 널 위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해라. 난 왜 그런지 네 생각만 하면 재채기가 나는구나. 그동안 못난 부모 만나 고생 많았다. 많이 고마웠고 많이 사랑했다. 벌써 보고 싶구나, 내 딸!     


그리고 은수야!

너는 꼭 서서방을 용서해야 한다. 서서방이 나한테 수면제를 가져다준 건 순전히 내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을 뿐 서서방이 나 죽으라고 그랬던 건 절대 아니다.

난 늘 생각해 왔듯 잘 죽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었는데 그 소원을 서서방 덕분에 이룰 수 있었어. 그러니 제발 서서방을 원망하지 말아라. 난 서서방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진심이야. 

.......

둘째 딸인 너에게 많은 사랑을 주지는 못했지만 늘 사랑했단다.          


다들 날 위해서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니 말이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리고 이미 죽어서 너희들 엄마를 만나고 있을 그때도 난 너무너무 행복할 것 같구나. 

내 딸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웠고 더없이 행복했다. 잘들 지내거라.      


그리고 서서방!

자네 덕분에 내 인생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진심일세. 나에 대한 죄책감은 절대 가질 필요가 없네. 다만 자네가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될까 봐 그게 걱정이 될 뿐이네. 

판사양반! 아니 존경하는 판사님!

우리 둘째 사위 서서방은 죄가 없습니다. 나의 간절한, 일부 협박이 포함된 강요에 의해 내게 수면제를 준 것이니 부디 서서방에게 죄를 묻지 말아 주십시오. 서서방은 법 없이도 살 아주 착한 사람입니다. 못난 장인을 만난 탓에 운이 없었을 뿐이니 부디 선처를 하시어 내 소중한 둘째 딸의 가정을 지켜주십시오.    

 

편지를 모두 읽은 은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검과 함께 자살방조에 대한 수사를 의뢰할게요.”

“자살방조요?”

눈을 동그랗게 뜬 형사에게 은수가 유서를 내밀었다. 그때 준석이 안치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만봉의 차가운 시신을 보자마자 흐느끼며 달려들었다.

“아버님!”

준석을 발견한 은수가 다가가서 있는 힘을 다해 준석의 뺨을 내리쳤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 아빠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난 아니야! 처음엔 그러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그날 난 수면제를 아버님 몰래 다시 가지고 나왔어. 급한 마음에 아버님이 주시는 통장도 함께 가지고 나왔지만 돈은 꼭 갚을게. 하지만 수면제는 정말 내가 아니야.”

“그럼 그 수면제가 왜 아빠 손에 있었어?”

“나도 모르겠어. 난 수면제를 다시 형님한테 가져다 드렸어.”

“누구? 형부?”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된 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형사가 다가왔다.

“일단 조사가 필요하니 함께 서로 가시죠.”    

 

며칠 후 민준의 진료실로 형사 두 명이 들이닥쳤다.

“뭡니까?”

놀란 민준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당신을 김만봉씨 자살방조 및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아니야! 내가 안 그랬어. 난 그저 부탁을 받고......”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당신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래? 서준석이 그렇게 말했어?”

“조용히 가시죠.”

곧 민준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김만봉 가출 15일 전     


점심시간 민준의 진료실로 준석이 들어섰다. 진료실 내부를 한 번 훑은 준석이 민준이 권한 의자에 앉았다.

“그래 할 이야기가 뭐야?”

민준이 묻자 준석은 망설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뭔데 그래? 또 돈 빌려달라는 말은 아닐 테고.”

“실은 장인어른이 죽고 싶어 하십니다.”

“그 나이에는 그런 소리 잘하지 않나?”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죽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제게 수면제를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수면제?”

민준이 호기심이 생긴 표정으로 준석에게 몸을 바짝 기울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괴로운지 준석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민준은 순간 만봉이 죽고 나면 자신의 외도 사실을 희수가 영원히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 정말 노인네가 죽고 싶어 한다는 말이지?”

“수면제를 구해오면 제게 3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뭘 망설이나? 가져다주면 되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요.”

“아니긴 뭐가 아냐? 죽고 싶어 하는 노인이 좀 더 쉽게 죽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인데.”

민준을 빤히 보던 준석이 머리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지금 돈이 너무 급해서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 돈 내가 줄게.”

“네?”

“수면제도 내가 구해주지. 자네는 그냥 내가 주는 약을 노인네한테 전해주기만 하면 돼.”

“형님!”

“약을 무사히 전해주고 노인네가 죽고 나면 자네한테 3억을 주겠네. 단 그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하고.” 

    

김만봉 가출 4일 전     


준석이 민준의 진료실로 들어섰다.

“그래, 약은 장인한테 잘 전해줬나?”

민준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물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준석이 안주머니에서 수면제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뭐야? 안 전해준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걸 도로 가져왔다는 말이야?”

고개를 떨군 준석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이 씨! 그만 가보게.”

준석이 돌아가자 민준은 약을 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만봉의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현관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현관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자 희수가 마트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몸을 잔뜩 웅크렸던 민준은 희수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차에 실려 있던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차에서 내린 민준은 주변을 살피며 빠르게 만봉의 집으로 올라갔다. 도어록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만봉을 찾았다. 만봉은 안방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있었다.

“아버님!”

민준이 만봉을 툭툭 건드려서 깨웠다. 만봉이 그 소리에 눈을 뜨고 민준을 빤히 보았다.

“자네는 강서방 아닌가?”

민준은 모자를 더 눌러썼다.

“아닙니다. 저 서서방입니다.”

“아, 그런가?”

만봉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모자 아래 민준의 얼굴을 살폈다. 민준은 시선을 피하며 다시 모자를 눌렀다.

“서서방이 맞군 그래, 그런데 아까 나갔는데 왜 다시 왔나?”

민준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제가 깜빡하고 약을 들고 갔지 뭡니까?”

“이 사람은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이리 주게.”

만봉이 손을 내밀자 민준은 약병을 손위에 올려주었다.

“꼭 한 번에 모두 드셔야 합니다.”

“알았네,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맙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얼른 가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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