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어릴 적엔 또래들보다 큰 키 때문에 나를 ‘자’ 삼아 키를 재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큰 키가 자랑스럽기는커녕 숨기고 싶어 오히려 구부정하게 다니곤 했는데 그 친구는 가끔씩 내 옆으로 와 키를 재면서 언제가 나를 넘어서고자 했다. 반대로 나는 친구의 운동실력이 부러웠다. 키만 컸지 민첩함이랄까, 운동신경이랄 게 없어서 체육시간만 되면 움츠러들었다. 피구나 발야구 등의 운동 경기를 할 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저 멀대 같이 서서 허우적거리다 일찌감치 아웃당하는 전략이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를, 친구는 나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질투했다.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쟤’보단 시험을 잘 보고 싶은 나만의 경쟁 상대가 있기도 했다. 누가 1등인지 평균 성적이 얼마인지보단 그 친구가 몇 점을 받았는지, 몇 등을 했는지가 중요했다. 1등이라도 높으면 기뻤고 내 점수가 낮으면 분하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해서 눈물을 훔쳤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 준비를 함께 하며 누군가는 원하는 곳에 입사했고 많은 이들은 실패했다. 나는 대체로 실패하는 쪽이었는데 대기업이며 정규직이며 탐나는 자리에 안착한 이들이 부러웠다. 겨우 얻은 자리에서 나만의 발버둥을 치며 조금씩 나아가고자 했다. 더디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남들처럼 승진도 하고 물도 먹고 하다 보니 각자의 현재 위치가 조금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친구와 같은 시기에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워 나가는 속도에서 차이가 났다. 나는 여전히 백돌이 신세인데 친구는 어느새 90타를 치고, 나는 아직도 7번 아이언으로 80m를 치는데 친구는 100m를 친단다. 나의 노력은 미진했고 그의 피, 땀, 눈물 섞인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배알이 꼴렸다.
영화 ‘승부’는 세계 최고의 바둑 대회에서 국내 최초의 우승자가 된 바둑기사 조훈현(이병헌 배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계를 제패하고 국내에는 적수가 없던 그에게 다음 과제는 그가 스승에게 바둑을 배웠 듯이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눈에 한 소년이 들어온다. 9세의 어린 소년인 이창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제자로 들이게 된다. 자신의 집에 들여 방도 내어주고 조훈현의 아내를 작은 엄마라 칭하며 함께 생활한다. 일찌감치 천재적인 수 읽기를 보이던 소년은 최고의 스승을 만나 날개를 단다. 스승과는 다른 길을 개척해 나가며 스승과 대결을 펼치기에 이른다. 내가 길러낸 제자와 맡붙어서 싸워야 하다니, 게다가 패배라니.
제자는 이겼지만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고, 스승은 진심으로 축하하기가 어렵다. 그러고 보면 청출어람이란 말은 아름답지만 어쩌면 존재하기 어려운 말일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경쟁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자의든 타의든 경쟁 구도로 묶이는 관계도 있다. 영화 ‘승부’는 단순히 이기고 지는 승패를 넘어서 서로 자극하고 자극받으며 그 안에서 서로를 배우고 결국엔 자신을 뛰어넘는 과정을 담았다. 진정한 승부는 자신을 한계를 인정하는 것임과 동시에 종국에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 아닐까.
어릴 적 내 엄마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 했다. 인생 길고 짧은 건 지나봐야 안다는 것. 사실 말은 쉽지만 마음을 다스리긴 어렵다. 그럴 때 이 영화가 도움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