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또래들에서는 드물게 나에게는 큰언니가 있다. 이 말은 작은 언니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 집은 딸 셋, 딸 부잣집이다. 장남이었던 우리 아빠에게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임무가 있었고, 아들을 바라던 시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 우리 엄마는 자식을 셋씩이나 낳았으나 결국 원하던 아들을 얻는데 실패했다. 나의 탄생 비화가 꼭 아름답거나 할 필요는 없지만, 막내조차 딸인것을 알았던 그 순간 엄마가 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서운했던 기억이다.
첫째와 둘째 모두 각자 위치에서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막내에게는 왠지 그것이 덜할 것 같은 가벼움이 먼저 묻어난다. 언니들과 모여 옛날 얘기를 해도 나는 크게 할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다. 언니들 잔심부름을 도맡았던 것,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낼 때 즈음 가계형편이 나아져 나는 하고 싶은 걸 대부분 해보았다는 시기 섞인 부러움 정도일 것이다. 어릴 때는 가족이 많은 것도 언니가 둘이나 있다는 것도 좋은지 몰랐다. 아예 좋다 싫다의 개념 조차 없었다 그냥 나고 자라는 내내 함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 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무던히도 싸웠다. 왜 언니 옷을 허락도 없이 입냐고, 싸울때면 왜 언니라고 부르지 않냐고,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고...세 자매에게 싸울 이유는 매일 차고 넘쳤다. 그러다 각자 사회인이 되고 결혼과 육아 등 다양한 선택들을 하면서 서로의 삶은 이제 비슷한 부분을 찾기 힘들 만큼 달라졌다. 성취욕 넘치는 큰언니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꿋꿋이 자기 삶 속에서 주인공을 도맡아 살고 있고, 작은언니는 결혼과 동시에 엄마가 되어 두 아이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내고 있으며, 난 그 중간쯤에서 갈팡질팡하며 기혼이지만 엄마는 아직 아닌 삶을 살고 있다. 이렇듯 현재의 각자에서 공통분모를 찾기 힘들어서인지 우리는 모이면 옛날 얘기를 많이 나눴다. 울다가 웃다가 언성을 높이다가 각자 위로를 전하기도 하며 그렇게 서른과 마흔의 고개를 넘는 중인 우리는 그 나름의 추억이라는 것을 또 쌓고 있었다.
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오게 됐고, 작은언니는 스스로의 선택을 믿고 캐나다로 떠났다. 짧았지만 서울에서 한 동네에 모여 살았던 우리는, 또 각자의 또 다른 선택으로 더 크고 넓게 멀어지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친구가 적은 나에게 언니들은 친구이자 가족이며 인생 동료가 되었다. 결국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각자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응원 정도가 전부일 테지만, 그것 조차 쉽지 않은 인생에서 무작정 위로해 달라고 기대기부터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막내지만 까칠하고 할 말 다 하던 나는(큰 언니는 나를 사포라고 부른다) 요즘 들어 지난날 내가 당차게 내뱉었던 수많은 직설들이 그들에게 혹여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를 많이 생각한다. 그리고 한없이 미안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내 엄마와 아빠, 언니들이 살아온 시간대를 나는 어쩔 수 없이 제일 늦게 통과하게 돼 있으므로 후회도 미련도 가장 늦게 알아차리겠지만, 아주 가끔은 나도 그들에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듣는 귀를 열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늘 나에게 언니가 많아서 좋겠다는 부러움을 이야기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이제야 나도 그 의미를 알겠다. 언니가 둘 씩이나 된다는 든든함이 이런거구나 하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