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에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원망스러운 배는 속절없이 꼬르륵 소리를 냈다. 몸은 소파에 있지만 정신은 자꾸만 주방으로 향했다. 나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소파 등받이에 파묻은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로 냄새를 음미했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는 너무나 황홀해 자꾸만 침이 고였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침을 삼키며 꼬르륵 소리가 들릴까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밥 먹자.
등 뒤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가 너무 고팠던 나는 눈을 비비는 척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는 수저를 든 채 식탁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식탁 앞에 앉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라면
식탁의 한가운데 놓인 냄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라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너무나 행복한 얼굴을 하며 라면을 먹는 모습이 어찌나 인상 깊던지 태양을 똑바로 본 것처럼 머릿속 깊숙이 새겨졌다. 한참 입맛을 다시던 나는 엄마에게 라면이 먹고 싶다고 말했고 엄마는 그날 텔레비전을 없애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실에 있던 텔레비전이 안방으로 옮겨졌다. 건강과 교육을 위한 일이라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과 함께였다. 텔레비전이 있던 거실 선반 위에는 각종 책들이 지금도 자리를 대신했다.
할아버지는 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으라는 말과 함께 라면을 덜어 내 앞에 놓았다. 아직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수프를 조금만 넣었는지 라면은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주황빛 국물 위로 드러난 노란 면발을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라면은 당시의 나에게도 싱거웠지만 태어나서 먹어본 라면 중에 제일 맛있었다. 어찌나 인상 깊고 맛있었는지 아직 할아버지의 라면보다 맛있는 라면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릇에 담긴 라면이 줄어들수록 행복감은 커져갔다. 평소 밥 한 그릇도 다 비우지 못해 혼나기 일쑤였지만 이날은 무려 세 그릇이 넘게 먹었다. 나는 냄비에 있던 라면까지 다 비우고서는 화가 났다는 것도 잊은 채 할아버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허허, 그렇게 맛있어?
네. 라면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지 몰랐어요.
맛있었다니 할아버지 기분도 좋구나.
다음에 라면 또 해주세요.
알겠다. 대신 할아버지가 라면 끓여줬다는 건 엄마, 아빠한테 비밀이다. 알겠지?
네, 알겠어요.
할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웃었다. 명절 때마다 나를 향해 짓던 환한 웃음이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마스에 올린 기억이 나는데 벌써 1월도 며칠 남지 않았어요.
인사가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ㅎㅎ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해가 바뀌었는데 다들 잘 지내셨나요? 저는 잘 못 지냈답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말이에요. 덕분에 글을 쓰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매일을 원망과 한탄으로 보내기 바빴답니다. (봄이 오기 전에 죽을 사람처럼 술도 많이 마셨고요.)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아요.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사랑이 개같이 끝이 났어요. 처음부터 상대는 저를 기만했으며 중장에는 그들과 제 이야기기까지 주고받았고 변하지 않은 모습에 참다못한 제가 헤어짐을 고했어요.
행복한 헤어짐이 어디 있겠느냐만 나의 경우에는 허망함과 허탈함이 남았고 기만으로 시작해 기만으로 끝났다는 것에 대한 한탄으로 가득해요. 못된 사람을 만난 것뿐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쉽사리 인정은 되지 않아요.
그만큼 상대를 사랑했다는 반증이니 조금의 위안은 돼요. 그것의 결과가 배신이라는 씁쓸함이 더 크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었구나. 그래서 힘이 드는 거구나. 하고요.
분노와 원망이 가득하지만 사실 아직 상대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어요. 이 마음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겠어요.
좋지 않은 일이고 또 제 이야기가 아닌지라 간략하게 적었어요. 어쨌든 이런 일로 인해 힘들어했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중이랍니다.
너무 황당한 일이라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도 못하겠더라고요. ㅎㅎ 나중에 만나게 된다면 그냥 보편적인 이유로 헤어지게 됐다고 말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