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정리를 마친 할아버지가 바지에 손을 닦으며 거실에 나왔다. 할아버지는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의 옆자리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기가 남은 탓에 할아버지의 손짓에 따라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으면 고개가 아팠을 테고 너무 빠르면 어지러웠을 텐데 힘과 속도가 알맞아 놀이로 느껴졌다. 나는 헤실헤실 웃으며 할아버지의 손에 고개를 맡겼다. 그러다 한 광고를 보고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갔다. 올해 그토록 받고 싶던 종이인형의 광고였다.
종이인형이 굉장히 고가이거나 구하기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트나 문방구에 버젓이 판매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단지 나에게만 예외였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있지만 가질 수 없는, 나에게 종이인형은 무지개와 같았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는 “왜 그러냐?” 라고 물었다. 방금 전까지 기분 좋게 웃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간절한 얼굴을 한 채 텔레비전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게 뭔데 그러냐?
산타 할아버지…….
나보고 산을 타라고?
아니 산타 할아버지요.
뉘 집 할아버지인지 이름 한번 특이하구나.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는 할아버지에게 1년에 딱 한번, 크리스마스에 찾아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사라지는, 추운 나라에서 썰매를 타고 오는 것부터 빨간 옷을 입고 다닌 다는 것, 그리고 내가 우는 이유까지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그딴 게 어디 있다고.” 라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 산타인지 무슨 선물이 받고 싶은데?
종이인형이요.
종이인형이 뭐냐?
종이로 된 인형에다 여러 가지 옷을 입히고 노는 거예요.
옷을 입혀? 그런 걸 왜 하려는 게냐? 다른 애들처럼 공도 차고 로봇도 가지고 놀고 하지.
할아버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처럼 벌게져있었다. 가까스로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지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별로에요. 저는 축구도 싫어하고 로봇도 안 좋아한단 말이에요. 여자애들이랑 같이 그림 그리고 소꿉놀이 하는 게 더 재미있단 말이에요.
어딜 사내새끼가 할 짓이 없어서 계집애들이나 하는 놀이를 해!
언짢은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내편이라 생각했던 터라 충격은 배가 됐다.
며칠 전까지 봄이 오지 않을 것처럼 매서운 추위가 계속되더니 요즘은 제법 봄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 같아요.
마지막에 올린 글이 1월 21일이었으니 한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설 연휴도 지나 완연한 새해가 밝았고 겨울도 끝나가는 이 마당에 아직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이거 참... 밀린 숙제를 마지못해 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내용도 엉망이 되고 있어 큰일입니다. 빨리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겨울은 유독 길게 느껴지네요? 추위에 씨름하다 빈번히 패배하여 이불속에 웅크리는 시간이 퍽 잦았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