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리 Apr 26. 2022

산타 할아버지 (4)

  어른 아이

  할아버지와 관계가 쉽사리 해소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사흘이나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일어나라.”, “밥 먹어라.” 외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중 몇 번은 “밥 먹어라.” 가 아닌 “밥.” 이라며 짧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나를 죄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할아버지의 행동은 종이인형을 선물로 바라는 게 그토록 화를 낼 일인가 하는 의아함을 넘어 사실 내가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허상마저 불러일으켰다.

  물론 유치원에 종이인형을 갖고 싶어 하는 남자는 나를 제외하고는 한명도 없었다. 오히려 종이인형을 가지고 노는 여자애들을 바보 같다 놀려댔고 걔들 중 짓궂은 몇몇은 그것을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여자애들은 그런 남자애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괴팍하다 비웃었다. 할아버지를 보는 내 기분이 그러했다. 나에게 할아버지의 행동은 짓궂은 남자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아빠의 아빠인, 어른의 어른인 할아버지였기에 괴팍하다 못해 한심하게까지 느껴졌다. 어른들이 나를 향해 아이라 부르는 것처럼 할아버지도 아이였다. 어른아이. 또래의 남자라면 유치원 선생님의 훈육으로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할아버지를 타일러줄 유치원 선생님은 없었다.


  외출

  할아버지와의 냉전은 사흘에 나흘을 더해 일주일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할아버지는 적막이 익숙해졌는지 며칠 전부터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침밥을 차리고 집을 나가 저녁시간에 들어오길 반복했다. 허옇게 센 머리 위에 갈색 중절모를 쓰고는 회색 코트를 입은 채였다. 나에 대한 감정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밥을 굶길 수는 없었는지 점심에는 잠시 돌아와 밥을 차리고 부리나케 다시 집을 나섰다. 코트와 모자를 썼다지만 영하의 날씨였기에 집에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코는 빨갰고 내 옆을 지나갈 때면 한기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릴 정도였다. 품에 남은 조그마한 한기로도 이 정도라면 몇 시간이나 밖에 나가있는 할아버지는 괜찮은지, 추운 날씨에 도대체 어디를 나가는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물어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할아버지가 외출할 때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관심을 대신했다.


  노인과 바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여느 날과 똑같이 아침을 먹고 외출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할아버지는 설거지를 마치고는 거실 소파 한편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길었던 외출이 끝난 것이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은 싫었기에 나는 냉전 중이라는 것도 잊은 채 환하게 웃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좋았다. 대화는 없었지만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아침을 먹고 나서 텔레비전을 보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지만 할아버지의 독서가 방해될까 싶어 집에서 가져온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꺼내 읽었다. 외골수의 옹졸하고 괴팍한 할아버지가 혈혈단신의 몸으로 고기를 잡기위해 바다에 나서는 내용이었다. 타인의 말을 귓등으로 무시한 채 고고하게 바다로 떠나는 노인과 할아버지가 비슷하다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한자로 적힌 이름 모를 책이 그리도 재밌는지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묵묵히 책을 읽었다. 간간이 들리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아니라면 눈을 뜬 채 잠을 자고 있다고 오해를 할 정도였다.

  이전과 같은 적막이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집에서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사뭇 달라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볼 때처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나에게 독서는 언제나 강제성을 띄고 있었기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내용을 암기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날만큼은 순전히 재미를 느끼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노인과 할아버지가 비슷한 이유도 한몫을 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3월 3일이니 두달이 다 되어가네요.

두달이라는 시간동안 짧고 굵은 봄이 한바탕 기분을 헤벌쭉 웃음이 나게 만들더니 이제는 청춘과 가장 닮아있는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어요.

제 글을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있을까.. 퍽 재밌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괜찮다는 정도는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글을 쓰는 행위를 접으려고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요.

그냥 그럴 때 있잖아요. 세상 모든 일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최근 제가 그랬습니다. 가뜩이나 심한 불면증은 더욱 심해져 술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 되고 그랬지 뭐예요? 한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몰라요.

지금도 완전히 괜찮아 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악이었던 한 달 전과 비교하면 많이 나이졌답니다. 물론 기분이라는 게 호수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강처럼 이리저리 흐르기 때문에 다시 변하기도 하겠지만요.

오랜만에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크리스마스에 쓰기 시작한 단편(치고도 짧은) 글을 여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완성하지 못했다니..

제 게으름에 새삼 놀랍니다. ㅎㅎ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Sarah Kang - Now i know를 들으며.

이전 15화 산타 할아버지 (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