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식사 후의 식곤증 때문이었다. 나는 손에 들린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렸다. 저녁을 먹은 지 한 시간이 채 안 된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 잠을 자는 시간은 열 시이니 잠을 자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누우면 바로 잠이 오는 게 아니라 한 두 시간은 걸렸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세 시간 이상이나 남았다. 나는 잠을 깨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몸을 비틀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몸짓에도 아랑곳 않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졸리면 들어가 자라.
할아버지가 말했다. 차가움도 따뜻함도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시선은 책을 향해 있어 나를 향해 하는 말인지 나는 할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퉁명스런 목소리로 “마음대로 해라.”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아마도 일주일이 넘는 냉전 끝에 용기를 내어 화해의 손길을 건네었는데 거절의 대답이 들려오자 기분이 퍽 상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이만 들어가서 잘게요.
그래라.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아까와는 달리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한 화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 내내 답답했던 마음이 가시며 청량감이 들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도 선물은 받지 못한 채 지나가게 되겠지만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왜?
메리 크리스마스.
뭐? 그게 뭔 소리냐?
할아버지는 드디어 책에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할아버지는 향해 환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향했다.
밤손님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에 들면 옆에서 사물놀이를 해도 깨지 않을 정도로 숙면에 빠지는 편이었지만 일찍 잠에 든 탓이었다. 몇 시인지는 모르지만 창밖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아 아침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문밖에서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점 내 쪽을 향해 가까워졌다. 평소에도 겁이 많은 나에게 어둠 속에 들리는 정체불명의 소리는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소리의 정체가 문을 열지 않기만을 바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문이 열리며 소리는 점점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잠에 든 척 눈을 감으며 제발 나를 해치지 말아주길. 아무 일도 없이 사라지길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머리맡에서 멈추었고 문 쪽을 향해 저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안도한 나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살짝 굽어진 등과 느린 걸음걸이, 창밖으로 비치는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하얀 머리까지. 너무나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나는 소리의 정체가 방을 나서고 나서도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바라봤다.
최근에 술이 문제라는 참 슬픈 말을 들었어요. 술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애주가 중 한 명으로써 너무나 속상한 말이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과연 술이 문제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한참을 고민하니 역시 사람이 문제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술이라는 건 커피나 물과 같은 음료에 지나지 않아요. 물론 술이라는 건 그것들보다 몸에 나쁘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유불급. 커피도 과하면 몸을 해치고 물도 많이 마시면 죽을 수가 있잖아요?
술은 잘 벼린 칼과 같은 게 아닐까 싶어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해치는 끔찍한 흉기가 되기도 하고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훌륭한 조각품이나 음식이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술도 같아요. 누군가에겐 흉포함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고 사랑을 키워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감성을 꺼내어 주기도 하고요. 술 취한 밤 감성적인 글을 SNS 등에 올리고 다음 날 이불 속 발길질을 해본 경험 한 번쯤 있잖아요?
술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좋은 보기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어요.(이렇게 술을 마실 핑계를 하나 더 찾는..ㅎㅎ)